세류청론 홍사중|「좋은 집안」의 명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과년한 딸을 가진 집안네에 하루는 중신어미가 찾아와서 신랑감을 소개했다. 중신어미는 『집안좋고 신랑좋고…』하고 한바탕 신랑집 선전을 늘어놓았다. 이말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좋은 집안」이란 어떤것일까하고 궁리해봤다.
옛날에는 좋은 집안이 많았던게 분명하다. 며칠전 중앙일보에 난 기사를 보니 여러해에걸쳐 안동준씨가 모은 가훈은 1백여 성씨에 1백70가지가 넘는다. 그중에는 「부귀영화를 탐하지말라」「자기 분수를 지키라」「친구를 가려서 사귀어라」「무리하게 재산을 불리려 하지말라」는등 요새도 우리의 귀감이 될 교훈들이 많았다.

<옛날의 "좋은집안">
이런 가훈을 만들어내는 어버이들이 많았고, 또 이를 후손들이 잘 지켜나갔던 옛날에는 정말로 「좋은 집안」이 많았다고 봐야옳다. 그것은 반드시 지체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집안을 뜻하지는 않았다. 옛날부터 우리는 「본보기 있는 집안」또는 「본이 뚜렷한 집안」을 제일로 쳤다.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 할때에도 부귀는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상놈의 집안」이라 할때에도 단순히 신분상으로 양반이 못된다는것이 아니라 「본」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뜻에서 쓰는 흉이었다.
그런 본보기가 될만한 집안이 오늘날 과연 몇이나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신어미의말로는 「좋은 집안」은 요새 많은것이다.
르네상스시대에 인문주의자 「포치오·부라치리오니」가 『고귀함에 대하여』라는 대화집을 내놓았다. 이 책속에서 「니콜로·니콜리」와 「로렌초·디·조반니」는 「예부터 물려받은 재산」「우수한 혈통」「공직에 종사한 경력」을 「고귀함」의 세가지 조건으로 들었다.
혈통을 중요시한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이다. 「레오나르드·브루니」는 인문주의학자로서의 명성과 부를 얻은 다음에는 좋은 혈통과 가까와지려고 애써 자기 아들을 명문의 딸과 결혼시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족보를 사는 경우도 흔히 있다고한다.
재산을 「고귀」의 또다른 조건으로 여긴것은 얼핏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중세 사람들을 강력하게 지배하고있던 그리스도교의 윤리로봐서는 부란 결코 존경받을만한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로마네스크의 교회당입구에 부각되어있는 지옥에서 시름하는 부자의 모습은 중세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것이었다. 당시 수도원이 번창했던것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부자들이 돈을 기부한 때문이었다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부라치리오니」의 대화집에서는 아무 재산이나 다 되는것이 아니라 「예부터 있는」재산이라고 못박아 놓고있다.
이를테면 정당한 수단으로 얻은 재산이면 된다는것이다.
여기서 「브루니」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재산을 옹호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학』을 번역하는 도중에 물질적인 부의 소유는 「덕」의 실행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상을 발견했다.

<고귀함의 3대조건>
「아리스토델레스」의 『니코아코스 윤리학』에서는 또 「선심잘쓴다」는 것을 덕목의 하나로 들고있다. 「선심」을 잘쓰려면 재산이 많아야한다. 따라서 재산을 지상에 쌓지말고 친국에 쌓으라고 복음서에는 적혀있지만 부를 모은다는것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덕을 지탱해주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주장했던것이다.
비슷한 사상은 「장자」라는 말에도 담겨져있다. 곧 청조의 고사가 유리초에 의하면 한대에도 장자란 연장자, 부귀를 갖춘사람, 덕행이 높은사람의 뜻으로 풀이되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모가 안나게되며 온후한 덕을 갖게된다. 그리고 부자가 이런 장자속에 끼게 되는것은 돈이 많으면 태어날때부터 너그럽고 인자하고 자비를 잘 베풀게되기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고귀함」의 마지막 조건이되는 「공직의 경력」은 지위가 높아야 한다고 본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의 피렌체에서는 공직이란 「감투」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공공에 봉사하는」기회일 뿐이었다. 철저한 공화제를 펴고있던 피렌체의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정부란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는」기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피렌체에서는 적어도 한번은 공직생활을 해보지 않으면 사람구실을 다했다고 볼수없다』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이와같은 「좋은 집안」의 세가지 조건은 영국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이 최고권력자에 오르기 직전에 자기가 「좋은 집안」의 출신임을 자랑할때에도 오랜혈통과,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재산, 그리고 공직에 봉사해왔다는 세가지 사실들을 내세웠다.

<뒤바뀐 전통사회>
중신어미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늘의 한국에 있어서의 「좋은 집안」에도 몇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혈통이 좋아야한다. 그것은 꼭 영의정의 몇대손이 되어야한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그저 아버지가 뭐를 했느냐는것만이 중요할뿐이다. 사실 해방전부터를 따진다는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리석기만하다. 우리나라처럼 해방을 계기로해서 전통사회가 철저하게 뒤바뀐 나라도 드물다.
이제는 예부터의 명문이란 전혀없는것이다. 예부터의 가훈을 지켜나간 집안과 오늘의 엘리트층을 이루고있는 집안과는 전혀 다르다.
『제사지낼때 집안형편에 맞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 황희정승의 후손이 지금 어디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좋은 뜻에서나, 나쁜 뜻에서나 우리는 완전한 「상놈의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중신어미가 내세우는 또 하나의 기준은 돈이다. 아무리 본보기가 있는 집안이라도 돈이 없으면 좋은 집안이 못된다. 그것은 크게 선심을 잘 쓸수있기 위해서 돈이 많아야한다는것이 아니다. 그저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을만큼의 재산은 있어야한다고 보기때문이다.
물론 남을 누를만큼 재산이 많으면 더욱 좋다.
재산을 어떻게 모았느냐는것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무덤에 묻힌 사람이나 무덤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부를 모았느냐는것보다도 무덤의 크기자체가 문제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있는것이다.

<선물양이 기준인가>
공직의 경험이 문제되는것도 그것이 최소한도의 부를 보장해주고 있기때문이다. 적어도 명절때 나가는 선물보다 받는 선물이 더 많을게 틀림없는 것이다. 공직을 공공에 봉사하는 기회라고 여기기에 내세우는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관직에서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좋은 집안」이 된다.
중신어미는 덧붙여 말한다. 『지난해 추석때 들어오는 갈비짝을 봤더니 l년내내 먹고도 남겠읍디다….』『그 댁의 가훈은 뭐라던가요?』
나는 곁에서 살짝 물어봤다. 중신어미는 가훈이 밥먹여주느냐는 식으로 잠시 냉소를 띠더니 그냥 그 댁 추석준비를 도와드리러 가야겠다며 무거운 엉덩이를 올리는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