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야당다운’ 야당이라는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언젠가 새정치민주연합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세월호 사건이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왜 새정치연합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느냐는 데 대한 토론이 이뤄졌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들었던 것은 ‘야당답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한 참석자의 평가였다. 그 토론자의 주장은 야당답기 위해서는 보다 투쟁적이어야 하고, 보다 선명한 진보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과연 ‘야당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야당은 사실상 집권의 가능성이 없었다. 선거가 주기적으로 이뤄졌지만 선거제도 등 경쟁 규칙은 권력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고, 관권 개입이나 금품 살포 역시 집권당의 승리를 도왔다. 따라서 권력의 향배는 선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런 조건에서 야당이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든 신민당이든 이전의 야당들은 모두 ‘전통 야당’의 신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당초 권력에서 배제돼 있었던 만큼 야당은 현실 문제를 해결할 권한도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책 결정에 대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야당은 구체적인 현실 정책과 무관하게 투쟁의 선명성이나 이념적 진보성에 집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집권 가능성이 없었던 시절의 야당은 opposition이라는 말 그대로 반대와 투쟁이 ‘야당다운 것’이었다. 1970년대 신민당 시절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이나 80년대 신한민주당 시절의 ‘이민우 구상’보다 김영삼의 선명 야당론이나 양김의 직선제 개헌 주장과 같은 강경하고 선명한 투쟁이 보다 큰 지지를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권력은 언제라도 교체될 수 있고, 실제로 야당은 과거 두 차례 집권에 성공한 바 있다. 이처럼 변화된 상황에서 ‘야당답다’는 것은 그 이전과는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야당답다’는 것은 반대와 투쟁에서가 아니라 재집권의 가능성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반대자로서의 야당이기보다는 권력의 대기자(待期者), 대안적 세력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새정치연합의 실제 사정은 이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요즘 우리 사회의 관심은 고용·주거·교육·퇴직 이후의 삶 등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돼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지속 가능한 발전, 미래 성장 동력, 함께 더불어 사는 삶과 관련된 사안도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저성장, 세계화 시대에 어느 것 하나 쉽게 풀어내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그런 만큼 유권자들의 관심은 어느 정치 세력이 이러한 산적한 난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 보다 나은 역량과 대안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데 놓여 있다. 야당이라고 해도 반대나 투쟁, 혹은 공허한 구호나 무책임한 공약으로는 결코 집권할 수 없는 것이다. 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을 누르고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노동당의 정책 역량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전시 연립 내각에서 보수당은 국방·외교 등 전쟁 수행의 업무를 담당했고 경제·복지 등 국내적 사안은 소수파 노동당이 담당했다. 전시 기간 중 노동당이 보여준 정책 역량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가 집권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새정치연합은 ‘전통 야당’ 시절에 가졌던 ‘야당다움’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이 보인다. 여전히 이념적 선명성이 강조되고, 투쟁성을 앞세우고,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사고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30% 이하로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이쯤 되면 사실상 유일한 야당인 새정치연합이 그로 인한 반사이익을 얻을 법도 하지만 다수 국민은 별로 관심의 눈길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많은 이가 새정치연합을 집권 가능한 대안 세력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일신문이 호남 지역 유권자를 대상으로 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0.1%가 새정치연합이 다음 대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집권이 가능하다는 응답은 40.8%였다. 정치적 거점인 호남에서 야당의 집권 가능성을 이처럼 낮게 보고 있다면, 다른 지역 유권자들의 신뢰와 기대감은 더욱 낮을 것이다.

 새로이 선출된 문재인 대표의 정치적 미래는 이처럼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오합지졸 같아 보이는 야당을 과연 신뢰할 만한 대안 세력으로 바꿔내는 지도력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데 놓일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야당다움’을 찾아내는 일이다. 집권을 꿈꿀 수 없는 정당은 정당이 아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