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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유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인생관이나 우주관이나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곧 그의 인성, 인격, 삶의 목적, 행위등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바르고 건강하고 확고한 인생관, 우주관, 가치관을 세우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또 개인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의 성격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 집단의 특성, 지향점, 가치의 표준 등에 따라서 그 집단의 움직임의 양태는 달라지게 마련이며 이런 것이 결국 독특한 국민성이나 민족성, 혹은 개성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주요원인이 되는줄 안다.
그래서 의식이 투명하고 총명하고 정의롭고 근면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녔던 민족의 문화가 인류역사에 더할 수 없는 향기를 뿌린 꽃으로 개화하였다면 난폭하고 무지하고 사납고 몽매한 집단이 오직 폭력으로만 군림하였던 시대에는 그 문화의 꽃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혀 파괴의 어두운 역사가 기록된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다.
우리나라 KAL여객기가 소련전투기의 폭격을 받았다. 2백69위의 죄없는 생령들이 차가운 북녘바다에 시체조차 갈갈이 찢겨 수장되었다. 전 세계는 경악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 당사국인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자칫 이성을 잃으면 이 끔찍한 만행을 피로써 응징하라는 절규가 나올 지경이다. 또 우리가 힘이 부족한 탓이라는 자탄과 함께 힘을 기르자는 소리도 드높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점검하고 각오를 달리하게도 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 사건의 배후를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는 미소의 경쟁이라는 정치적 차원 이상의 집단의 성격의 대립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용서 못할 소련의 비인간적 행위가 저들에게는 군사적 전력상의 수행이었다고 발뺌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비행기가 비무장의 여객기였다는 것, 그 속에는 그런 무자비한 폭격을 상상조차 못하는 선량한 승객들이 탑승하고 있다는 것등이 그들에게 고려되었을 턱이 없다.
저들은 사람의 생명조차 사상과 이념을 위한 도구 이상의 것이 될수 없다는 사고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늘 주입 받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자면 저들과는 대화가 될 수 없는 집단인 것이다.
우리 진혼단들은 말없이 출렁이는 비극의 바다에 이르러 꽃다발을 던져 원혼을 위로하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가 깊은 바닷속까지 미치는 듯 하였다.
어떤 유족들은 망자가 생전에 좋아하던 시집과 장난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또 어떤 분은 그 차가운 바다에서 얼마나 춥겠니 하면서 두꺼운 겨울옷을 던지기도 하였다. 눈물겹고도 가슴 아픈 정경이 아닐수 없었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과 똑같이 배고프고 춥고 보고 싶고 기뻐하고 슬퍼한다고 믿는 우리들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이 저들 강철심장의 유물론자들에게는 조금도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원통하게 사라진 승객들 중에는 70노인도 있었고 어머니품에 안겨오던 재롱둥이 아기도 있었다. 청운의 뜻을 풀고 이국에 유학하여 이제 그 웅지를 조국땅에 펼치려는 젊은이도 있었고 늙으신 부모님을 뵈러 귀국하는 아들도 있었다. 임무수행을 위하여 여행하던 이국의 관리도 있었고 그들 모두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하여 잠 안자고 봉사하던 승무원들도 있었다.
또 그들 중에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총각들이 있었다. 이들의 원통한 고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남은 가족들이 사돈을 맺고 영혼결혼식을 약속하였다. 그들은 저승 저쪽에서 부부로서의 가연을 맺어 외롭지 않게 서로 의지하며 있게될 것이다.
바로 이런것이 한국인들의 심층에 뿌리하는 사고들이다. 우리가 과학을 몰라서도 아니고 의식이 미개하여서도 아니다. 과학이나 지식을 초월하는 세계를 우리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더 확대되면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애 정신, 우주 모든 만물을 사랑하고 존엄하게 여기는 외경심등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지구 위에는 수많은 인간의 집단, 국가들이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소련식의 철면피하고 비인도적 사고를 편드는 집단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집단이 많은 것이 유엔에서 입증되었다. 이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사랑의 힘이 작용하는 탓이 아닌가 싶다.
지금 사고지역의 바다에서는 유품이며 잔해들이 떠오르고 있다. 어느 젊은 모자의 사진을 보며 우리들은 다시 한번 비분의 울음을 아프게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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