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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5)제80화 한일회담(14)|일본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외교위원회의 일원으로 대미 각서작성에 노력한 인연으로 나는 어느덧 사령장 없는 외무부 직원이나 된 것처럼 한일회담 준비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때 이 일에 가장 많이 편의를 제공해준 사람은 한국은행 부총재로서 조사부장을 겸직하고있던 장기영씨였다.
장씨는 해방 직후의 그 혼란북새통에 방대한 『1949년판 경제연감』을 만들어낸 청년부총재로서 추진력도 대단했지만 그가 배경으로 하고있는 한국은행의 위력도 컸다. 15년 후인 60년대 중반기 이후 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로 그가 보여준 왕성한 추진력으로 『불도저』 라는 별호를 얻게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회담준비에 필요한 외국의 서적이나 자료는 그에게 부탁하면 대개는 단 시간내에 입수할 수 있어서 51년6월부터 7월에 걸쳐 나는 자주 그의 방에 드나들며 회담에 관한 준비를 했다.
외교위원중 이건호씨 (현 국회의원)는 고대에서 국제법을 강의하던 청년학자로서 변영태 외무장관의 각별한 관심을 끌던 인재였다. 당시 국제법에 관해 아는 인재가 드물기도 했거니와 그의 온화하나 강인한 성품을 변장관은 크게 평가했던 것 같다.
변장관은 이교수를 외무부간부(정보국장) 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이교수의 사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하옇든 피난지 부산에 앉아 가지고는 회담준비에 여의치 못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피난살림이라 우리정부관계의 서류도 쉽게 얻어 볼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일본측 자료를 입수하기도 반드시 쉽지 않았다.
당시 소문으로 일본정부에는 배상청이라는 기관이 특설되어 전후의 배상문제처리를 전담하고 있는데 조선과 직원만해도 30여명이 된다고 했다. 한일회담이 열릴 경우 우리측 창구가 되는 외무부의 당시 본부직원이 20여명에 불과했던 우리 형편과 일본쪽 사정을 대조해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한일회담은 조만간 열어야할 판인데 우리는 특설기관은 커녕 정부수립직후에 작성했던 엉성한「대일배상요구조서」2권 밖에는 이렇다할 자료를 갖고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에 사람을 보내 그쪽의 형편도 살피고 문헌과 자료도 수집해야겠다는 논의가 일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나와 장기영씨가 파견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우리나라 형편으로는 비공식이나마 정부를 대표해서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은 미상불 일종의 특전이라 할수 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인선을 놓고 정부 내에서 나를 보내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듣고있으나 나머지 한사람의 선정을 놓고 옥신각신했던 것 같다.
장씨가 적격자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를 민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있던 경제각료 한분이 조선식산은행 총재였던 임송본씨를 강력히 추천해 줄다리기가 있었던 것으로 듣고있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임총재와 네가 가기로 결정됐는데 막상 떠나려 하니까 여비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외상출장이라면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나 당시 내가 실제로 겪었던 웃지 못할 정부수립초기의 에피소드라고나 할까.
과히 유쾌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일은 급하고 또 정부의 말대로 가있으면 차차 보내줄 것 같아 몇몇 친구에게 돈을 꾸어 외상출장에 응하기로 했다.
임씨와 나는 7월20일 수영비행장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그때 내가 받은 정식 사명은 주일대표부의 법률고문자격이었고 임씨는 경제고문자격으로 한일회담의 기초적 준비와 아울러 그때 주일대표부와 SCAP사이에 진행되고있던 교포문제에 관한 교섭을 측면에서 도우라는 것이었다.
설마 정부가 여비를 안보내주랴했던 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부는 내가 일본서 돌아온지 한달이 넘어도 일본여행 때문에 내가 진 빚을 갚을 여비를 내주지 않았다. 변장관에게 여러번 독촉을 했지만 입맛만 다시고 대답이 없었다.
간접으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여비는 여행중의 비용으로 쓰라는 것인데 무슨 돈으로든지 여행을 마치고 왔으면 그만이지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여비를 내주겠느냐고 대통령 주변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0월중순 내가 한일회담대표로 다시 인선되자 그제서야 외상출장비를 내주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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