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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에게 새벽게임 금지령 … "학생 보호" "우릴 애 취급"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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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포스텍이 최근 등록금 고지서와 함께 각 가정으로 발송한 게임 셧다운제 공문.

포스텍(POSTECH·옛 포항공대)이 다음달 1일부터 교내 주거 지역에서 게임 셧다운제를 실시한다. 기숙사, 대학원 아파트, 연구원 숙소인 포스빌을 대상으로 오전 2시부터 7시까지 매일 다섯 시간 동안 게임 사이트 접속을 차단한다는 계획이다. 대학 측은 최근 등록금 고지서와 함께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공문을 재학생들의 각 가정에 발송했다.

 학생들에게 셧다운제 시행이 알려진 건 지난달 22일. 총학생회가 포스텍 온라인정보시스템 ‘povis’의 자유게시판에 학교의 통보를 공지하면서다. 게시판엔 ‘셧다운제’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청소년 대상의 셧다운제를 성인인 학생에게 적용하는 게 옳은지, 과학 교육의 현장에서조차 게임을 유해 행위로 봐야 하는지 등 논란이 뜨겁다. 총학생회는 6일 대자보 게시를 시작으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룸메이트 수면권도 보장해야”

학교 측이 처음 셧다운제 시행을 통보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같은 해 11월 초 교내 회보를 통해 주거 지역의 인터넷 게임 이용 현황을 공개한 후였다. 포스텍 정보기술지원팀은 앞서 9월 한 달간 인터넷 게임에 이용된 트래픽을 집계했다. 전체 게임 트래픽의 65% 이상을 차지한 ‘리그 오브 레전드(LOL)’ 이용 시간이 많은 사용자 10명의 사용 현황도 분석했다. 이들의 일평균 이용시간은 6시간42분이었고 가장 게임을 많이 한 사용자의 이용 시간은 11시간24분이었다. 한 달 중 19일, 222시간 동안 게임을 하는 심각한 과몰입이라는 게 학교 측의 주장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돼 학교는 규제안을 제시했고 방학을 틈 타 시행을 통보했다. 처음 제시한 접속 차단시간은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오후 9시까지 매일 22시간이었다. 학생들의 반발이 심상찮자 규제 시간을 다섯 시간으로 줄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도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원종 포스텍 총학생회장은 “국가가 시행 중인 청소년 대상 셧다운제도 실효성 논란을 빚는데 이런 실패한 정책을 이공계 글로벌 리더를 교육하는 포스텍이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게임 셧다운제 시행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게임 과몰입에 따른 학업 및 생활 문제 ▶새벽 시간대 게임 행위로 인한 룸메이트 수면권 침해 ▶학교 공용 자산인 트래픽 데이터를 게임 같은 소모적인 곳에 사용하는 것이다. 포스텍 학술정보처 측은 “시험적으로 시행하는 것으로 차후 수정할 수도 있어 지금 발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김대진 학술정보처장(컴퓨터공학과) 등 담당자와 학생 대표가 가진 회의를 통해 학교 측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povis’를 통해 공개된 회의록에 따르면 김 처장은 “(게임 셧다운제가) 학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집에서 밤새 게임을 하면 부모님이 가만히 두겠는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을 누군가는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루 10시간 넘게 게임하는 학생이 있다는 데이터는 충격적이었다”며 “지도학생 중 3명이 학사경고로 퇴학을 당했고 그중 2명이 게임을 너무 많이 한 것이 큰 사유였다”고도 했다. “새벽에 게임하는 룸메이트에게 살인충동을 느낀다”고 게시판에 글을 올린 학생의 사례도 규제 이유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공대생들, 막아봐야 다 뚫는다”

일러스트 강일구=ilgook@hanmail.net

지난 2일 열린 긴급 전체학생대의원 회의에서는 규제 반대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셧다운제가 자율권을 침해하는 데다 의사결정 과정도 일방적이라는 주장이었다. 학생들은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포스텍의 특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기 때문에 기숙사는 집과 같은데, 기숙사에서 개인 생활을 규제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는 얘기다. 일부 학생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자는 주장도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상 학교가 부모 역할을 할 때도 있다”는 교수들과 “성인이 알아서 책임지는 것”이라는 학생들 입장이 가장 크게 충돌하는 부분이다.

 비민주적인 결정 과정도 문제 삼고 있다. “학생들은 정책 구상에 있어 파트너가 아니다” “내 신념이기에 절대 철폐할 수 없다”는 학교 측 발언이 공개된 후 학생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긴급 전체학생대의원 회의에서도 “학교의 구성원인 학생을 함께 논의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석·박사 통합과정 9학기에 재학 중인 A씨는 “학교가 교수-학생 구도에 얽매여 엄연한 성인인 학생을 ‘애 취급’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의 실효성도 도마에 오른다. 게임 과몰입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셧다운제는 온라인 게임만 제한해 콘솔·모바일 게임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막힌 사이트쯤은 다 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인터넷 환경이 척박했던 1990년대 포스텍 학생들은 직접 기숙사 방에 랜선을 깔아 스타크래프트 열풍에 합류했다. 학교도 당연히 이를 알고 있다. 김 처장은 “우회할 수 있으면 알아서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가 게임 중독에 빠진 학생들을 구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공계 특화대학인 포스텍이 게임을 ‘소모적’이라 표현한 것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10월 포스텍에선 ‘게임잼코리아 2014’ 경진대회가 열렸다. 포스텍 창의IT융학공학과의 융합인재교육 일환으로 학교가 개최한 게임 창작 대회였다. 학교가 승인한 학내 동아리 중에도 ‘G-POS’라는 게임제작 동아리가 있다. 이원종 총학생회장은 “게임을 잘 만들면 상을 주면서 셧다운제를 통해 게임을 규제하고 있다”며 “이공계 특화 대학에서 콘텐트 산업의 핵심인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공용 자산인 트래픽이 소모적인 데 쓰이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면 게임보다는 P2P 사이트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인 B씨는 “학교 측 설명대로라면 게이머가 아니라 헤비 다운로더를 규제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석·박사 통합과정 2년차인 C씨는 “학교가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규제를 강행하려는 것은 ‘우리 학생들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외부에 보여주려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총학은 룸메이트의 수면권 침해 해결을 위한 방안은 제시했다. 게임뿐 아니라 흡연 여부, 생활 방식 차이에 따른 갈등을 줄일 수 있도록 학기 중에도 방 변경을 가능하게 하자는 것이다. 또 일부 게임 과몰입인 학생을 위해선 교내 상담센터의 프로그램을 통해 통제력을 길러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일단 규제를 강행한다는 입장이다. 학생들의 제안을 병행하면서 6개월 후 결과를 보자는 것이다.

 학생들은 본격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긴급대의원회의를 통해 대자보 작성, 서명운동, 시위·퍼포먼스 등을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전체 학부생이 1400명 남짓일 정도로 학생 수가 적고 학업 부담이 큰 포스텍에선 단체 행동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원종 총학생회장은 “강경하게 대응해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크다”며 “셧다운제 폐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KAIST도 한때 제한했다가 풀어

대학가의 게임 규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초 서울대를 다닌 KAIST(한국과학기술원)의 한 교수는 “학교 다닐 때 스타크래프트가 한창 인기여서 학교 PC실과 연구실에서 게임을 하곤 했다”며 “학교에서 접속을 차단했지만 다 뚫려서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활공간인 기숙사에서 특별한 규제를 두고 있는 학교는 거의 없다. 충남대·영남대 등처럼 통신량 증가에 따른 인터넷 속도 저하?끊김을 방지하기 위해 파일 공유 프로그램 접속을 차단하는 경우는 있다.

 포스텍과 똑같은 논란을 겪은 곳은 KAIST다. 이공계 라이벌인 두 대학의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아무 제한이 없지만 KAIST도 한때 셧다운제 검토·추진·철회를 반복했다. 2009년엔 직접 규제에 나서기도 했다. 오전 2시부터 7시까지 워크래프트3·리니지 등 접속이 잦은 게임을 막았다. “게임 중독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의 문제가 심각하고 국민 세금으로 구축한 학교 내 인터넷 인프라를 게임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때도 “중독 학생만이 아닌 모든 학생을 규제해 인권을 침해한다” “문화기술대학원을 만든 학교의 취지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등 반발이 이어졌다.

 당시 KAIST와 지금 포스텍 학생들이 아쉬워하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왜 학생들이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지 학교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학교의 위치, 학업 특성상 여가활동의 제약이 많은 상황을 이해하고 있느냐는 주장이다. KAIST의 한 교수는 “학업 부담이 크고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두 대학 학생들이 손쉬운 여가활동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게임뿐이다”라며 “게임 몰입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여가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배려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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