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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이 바둑판만하게 녹아붙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비릿한 갯내음이 코를 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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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까나이서 70km>
해변 곳곳에는 빈 조개껍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지난9일 KAL기의 고유번호가 찍힌 수직날개가 발견됐던 홋까이도 북단 사루후쓰(원불)마을은 술안주로 쓰이는 가이바시라 조개의 주생산지.
일본 총생산량의 5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11일 상오7시쯤 왓까나이에서 택시를 전세내 70km 떨어진 사루후쓰에 도착한것은 상오8시 조금 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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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명이 한조>
가랑비속에 하얀 철모와우의, 검은 장화를 신은 경찰관들이 2∼3명씩 한조가 되어 해안 모래밭으로 밀려나온 쓰레기를 뒤지고있었으며 이 마을주민 20여명도 자진해서 수색활동을 돕고 있었다.
해안도로에서 차를 내려 수색현장으로 다가가 한국기자라고 밝히자 조장으로 보이는 40대후반의 경찰관이 『수고가 많다』며 악수를 청한뒤 『마침 잘왔다』면서 방금 주웠다는 여자용 비닐샌들을 내보이며 샌들바닥에 인쇄된 한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발바닥길이 23cm정도의 빨간색 비닐샌들(왼쪽)의 밑바닥에는 「화성실업」이라고 쓰여져있었고 상표인듯한 코끼리메달이 샌들 끈위에 붙어있었다.
한국제품임이 틀림없다고 확인해주자 그는 『감사하다』며 헬미트를 벗어 정중히 인사했다.
이 샌들은 이날 상오8시 이 마을 「고마쓰·다께요시」(21·소송효길)씨가 해변에 밀려나온 해초더미에서 주운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 탑승객이 비닐제품의 샌들을 신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비바람속에 너무도 열심히 찾고 있는 경찰관들에게 실망을 줄것같아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경찰관들은 길이2m 가량의 나무막대기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나온 해초와 쓰레기더미를 막대기로 뒤집고 조금만 이상한 물건이면 무조건 비닐봉지에 담아 해안도로위에 대기중인 퍼트롤 카에 인계, 왓까나이경찰서로 운반하고 있었다.
해변을 뗘나 발길을 5백여m 남쪽으로 옮겼을 때 「강릉탁주」라고 쓰여진 빈비닐통1개가 모래밭에 뒹굴고 있었다.
아마 우리 원양어선 선원들이 출항할때 갖고와 홋까이도 근처해역에서 버린것같았다. 상오9시쯤 사루후쓰마을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해변에서 비행기 비상출입구 문짝으로 보이는 가로23cm·세로38m·두께5cm가량의 쭈그러진 알루미늄판이 모래속에 처박혀 있는 것이 발견됐다.
형편없이 오그라붙은 이 파편의 한쪽구석에는 『구명」이라는 한자와 『LIFE·VE』라는 영문자가 쓰여져 있었다.
비행기조난때 승객들에게 알리는 『구명동의는 좌석밑에 있읍니다』는 글자가 일부 떨어져 나갔고 『구명』자만 남은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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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쓰인 식탁도>
사람키보다 높은 비행기문짝이 바둑판크기만큼 오그라들고 사방이 찢져나간 것으로 보아 KAL기가 피격될때 동체가 박살이 난것같다.
상오9시10분쯤에는 이마을 「요나가·에이이찌」(46·세영영일)씨가 해안북쪽에서 주운 남자부츠1개(오른쪽)를 들고왔다.
발바닥길이28cm·목길이20cm가량의 갈색부츠에는 지퍼가 달려있었으나 상표가없어 어느나라 제품인지는 알길이 없었다. 상오10시15분쯤 경찰관1명이 모자가 달린 흰색 나일론 점퍼를 바위틈에서 꺼내왔다.
등길이55cm, 소매길이55cm인 이 점퍼의 양쪽 포키트속을 뒤져보았으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고 상표도 붙어있지 않았다.
앞쪽에 붙은 금속지퍼에는 「YKK」라는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상오10시50분쯤 해안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해변에서 주민 「오니야나기·도미지로」(?유부차낭)씨가 KAL기의 좌석뒤에 붙은 간이식탁용 합판l개를 주워 퍼트롤 카로 달려왔다.
갈색 레더를 입힌 합판에는 물컵을 놓는 자리가 둥글게 패어져 있었고 『착석중에는 안전벨트를 매시오. 구명동의는 좌석밑에 있읍니다』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상오11시쯤에는 짙은 안개가 낀 해변상공을 해상보안청소속 헬리콥터(MH517)l대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낮게 날았다.
조종석 옆자리에 탄 수색대원은 쌍안경을 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찾다가 해변의 수색 경찰관들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이날 오전중 사루후쓰마을앞 해안에서만도 KAL기 유류품으로 확인된 물건과 파편조각이 13점이나 발견됐고, 그밖에도 30여점의 각종 표류물이 수집돼 왓까나이 경찰서로 보내졌다.
수색현장에는 비바람이 초속8∼15m로 몹시 강하게 불고 있었으며 2∼3m의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감아올리며 해변가로 해조류와 각종 쓰레기들을 밀고왔다가 가곤했다.
○…………

<하루에 80점수거>
사루후쓰해변 수색의 책임자인, 「아이우찌」순사부장(47)은 『오늘은 파도가 너무 높고 시계도 좋지않아 작업이 부진하지만 날이 개면 좋은 결과가 있을것같다』고 했다.
사루후쓰해안은 대마난류가 KAL기추락지점으로 추정되는 모네론섬 주위를 한바퀴돌아 사할린서쪽 해안을 말고 남하해 소오야(종곡)해협을 통과, 오호츠크해로 빠지는 길목이다.
낮12시30분쯤 마을에 잠깐 들러 어업조합장 「오오따·긴이끼」(67·태전금일)씨를 만났더니 『소련이 전관수역을 2백해리로 선포한 이래 어획고가 많이 줄어 매년 어민대표가 소련에 가서 어로권신청을 하는등 애로가 많다』면서 『소련이 저지른 만행의 증거물등을 우리마을에서 제일 먼저 찾아내 기쁘다』고 했다.
마을을 나설때 이곳에서 남쪽으로 2백50여km떨어진 아바시리(망주)항 해변에서 목이 없는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현장을 다녀오는데 자동차로 12시간이상 소요된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발길을 왓까나이로 돌릴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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