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맞은 8월-이젠 잊혀져가는 그 기쁜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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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약력 ▲35년 만주 심양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고려대대학원 사학과 문학박사 ▲성신여대 부교수 ▲저서 『한국근대여성운동사』 『이조여성사』 『한국여성독립운동사』등
8월은 나의 어린시절중 잊을수없는 달이다. 도회지에서 낳아 자란 내가 시골의 풍요로운 자연의 맛과 멋을 비교적 잘 느끼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여름방학때마다 찾아갈 수 있었던 시골 큰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숙제를 미리 몰아해 놓으면 으레 7월이 가고 8월이 된다. 곤충채집·식물채집 숙제를 하려면 시골엘 가야 한다면서 바쁜 엄마를 졸라 큰댁으로 간다.
논둑으로 걸어 들어오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멀리 보이면 큰어머님은 벌써 밭에 나가 재빨리 옥수수를 한 소쿠리 따다가 윤기 흐르는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당기신다. 우리가 안채 대청마루에 짐을 내리고 찬물 세수를 마치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노란 옥수수를 하모니카를 연상하며 불어 댈 수 있도록 대령해 주셨다.
어른들이 밀렸던 말씀을 나누는 사이, 나는 또래의 조카 사촌들과 같이 뒷산에 올라가 빨간 산딸기를 따먹으면서 매미를 쫓는다. 해가 뉘엿해지면 조카들이 개울가에서 잡은 개구리와 사촌들이 자기 밭에서 서리한 풋콩을 구워먹는다. 밤이면 마당에 멍석 깔고 모깃불 연기 내음 맡으면서 밤하늘의 별을 센다.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날들을 회상할 때 8월은 이처럼 잊을 수 없는 달이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온갖곡식과 과일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8월은 분명 우리에게 결실의 환희를 안겨주는 희망의 달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8월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로 하여금 결실의 환희를 누리지못하도록 했던 숱한 핍박이 있었다 .1910년, 무더위가 가시고 가을 길목에 들어서려던 8월29일에 우려는 국망의 뼈아픈 비극을 맛보아야했었다. 우리의 역사는 단절되고 우리의 말은 송두리째 빼앗기고 우리의 눈과 귀는 어둡게 가려졌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는 왜군의 말발굽아래 황폐화하여 봄이 올 줄 몰랐다.
우리는 36년간 뜨거운 햇볕아래 가을을 영글게 하는 8월을 맞이하고자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했으며 얼마나 애타는 기도로 울부짖었던가. 이준열사, 안중근의사, 류보순열사, 김마리아선생…이들은 모두 8월의 결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신 분들이었으며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해외독립운동등은 2천만 한민족의 함성이었다.
1945년8월, 우리는 마침내 풍요로운 결실의 8월을 다시 맞이할 수 있었다.
내가 광복을 맞이한 것은 며칠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수수밭길이 연이은 만주의 어느 시골에서였다.
전쟁을 피하여 시골로 피난가던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우리는 얼마나 환희했는지 모른다. 일제하 소학교 교과서의 만국기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태극기가 펄럭였고, 만세소리와 애국가가 중국인 시골 마을을 뒤흔들었다. 그날 어머니는 어린시절 몰래 불렀던 애국가라면서 우리에게 『동해물과 백두산…』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까지 내 나라 역사를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나로서는 해방의 뜻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덩달아 기뻐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기쁨은 8월의 기능을 이제야 다 할 수 있기 되었으며 결실하는 환희의 9월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날 울 밑에 처량히 서있던 봉선화는 화사한 새아씨로 단장하고 무궁화는 더욱 활짝 피었었을 것이다. 36년간 비애와 통한으로 때묻었던 자유도 다시 밝은 햇살아래 눈부신 빛을 발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이 있은지 38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는 내 어린 시절의 8월의 추억도 찾아볼 길 없게 되었으며, 8월은 떠들썩한 바캉스, 뇌염등의 북새통에 뜨겁고 지루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참 환희가 결실되는 9월의 길목은 아직도 오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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