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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내기’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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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소개팅 상대가 “어디 갈까요”라고 물었을 때 하필 그곳을 떠올린 게 죄라면 죄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가 메뉴를 펼쳤는데 이런,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순간 보고야 말았다. 상대방의 얼굴에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진 낭패와 경멸의 표정.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제일 싼 메뉴를 주문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내면 되잖아?’ 그러나 계산대 앞에서 “같이 낼게요”라고 입을 떼는 순간, 또 확인하고야 만다. 뭐야, 이 여자. 나 무시하는 거야? 하는 표정.

 이런 경험, 나만 한 건 아닐 거다. 한국을 대표하는 만남 문화인 소개팅이 도입된 지 어언 수십 년인데 아직도 소개팅 비용 문제만큼은 사회적 합의가 안 돼 있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다.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소개팅 나가는데 더치 페이(Dutch pay) 해도 되나요’라는 초심자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답변은 다양하다. 철저한 더치 페이파도 있고, 더치 페이를 요구하는 것은 상대방이 맘에 안 든다는 뜻이라는 해석해 1차는 남자가 2차는 여자가 내는 게 자연스럽다는 절충 의견도 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특히 남녀관계)가 그렇듯 논리는 잘 통하지 않는다. “예쁘면 아무리 비싸도 낸다. 못생기면 100원도 아까워.” 이런 의견도 다수인 걸 보면.

 실은 여자들도 고민이다. 배곯고 사는 시대도 아닌데 맛난 음식 배터지게 먹어보려고 소개팅 나가는 여자가 얼마나 되겠나. 내 배로 들어가는 밥, 내 돈 내고 먹는 게 맘 편하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상대방이 맘에 들 경우에는 더욱더. 더치 페이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상대 남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건 아닌지, 혹시 ‘지나치게 독립적인’ 여자로 보이는 건 아닌지 싶어서다. 남녀는 동등하다고 되뇌는 자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관계는 남자가 주도하는 게 좋다는 통념에 지배받는 자아가 맞선다. 결국 밥값을 능가하는 커피와 디저트를 사면서 분열된 자아를 주섬주섬 복구한다.

 최근 소개팅 상대 여성에게 “너를 만나 40만원이나 썼는데 너는 한 푼도 안 쓰냐”고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을 행사한 30대 남자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씁쓸한 이야기다. 괜히 상대방 자존심 세워주려다 범죄에 연루되지 않으려면 소개팅 더치 페이 문화 정착에 앞장서는 여자들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 아,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더치 페이는 ‘각자내기’라는 우리말로 바꾸는 게 좋다고 한다. 시련은 셀프, 밥값은 각자내기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