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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은퇴하고 나면 후회되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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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우리나라 은퇴자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해 말 한 은퇴연구소에서 50세 이상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건강, 돈과 생활, 일과 인간관계라는 삶의 3가지 영역에 걸쳐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먼저 건강에서는 운동으로 체력을 다지지 못한 것, 스트레스 해소법을 익히지 못한 것 순으로 후회했다. 돈과 생활에 관련해선 노후에 쓸 여가 자금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여행하지 못한 것 순으로 후회하고 있었고, 노후 소득을 준비하기 위해 생애설계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대상으로 꼽았다.

일과 인간관계에서는 평생 즐길 취미를 만들지 않은 것을 가장 후회하고 있었으며, 자녀와 대화가 부족했던 것, 자녀를 좀 더 사교성 있고 대범하게 키우지 못한 것, 부부간 대화가 부족했던 것 등 주로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후회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해 현재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됐다는 뜻이다. 젊었을 때 얼마든지 후회해도 만회하거나 복원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러나 늙어서 후회하면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기차는 떠나가버렸다. 은퇴한 노년기에 돈을 모은다는 것, 잃은 건강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 노인은 자기 중심적이고 고집이 강해 훼손된 인간관계를 되찾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은 젊었을 때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평소 연금 재원을 많이 만들어 놓고 운동을 게을리 하지 말며 가족들한테 잘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 현상유지 편향

그런데, 그게 쉽지않다. 당장 눈 앞이 급하고 먼 훗날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탓이다. 직장인이 회사를 떠날 때 받는 퇴직 급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 퇴직급여제도는 회사가 퇴직금을 적립해 대신 굴려주거나(DB형) 근로자 개인에게 매년 일정금액을 적립해 주고 알아서 운용케 한 다음 퇴직후 연금(DC형)으로 쓰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2014년 6월 기준 연금 수급조건을 갖춘 55세 이상 퇴직자의 대부분은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하고 있다. 일시금 수급자 비율은 97%에 이른다. 연금수령자는 3%에 불과하다. 사실 연금 자체는 그렇게 썩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다. 받을 돈을 찔끔 찔끔 받는 것보다는 나중에야 어찌되든 일시금을 한번에 챙기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해 9월 말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69%를 차지하고 있는 DB형은 전체 자산의 98%(59조3641억원)를 원금보장형으로 가입하고 있다. 원금보장형은 은행예금이나 채권처럼 원금이 깨질 리 없는 ‘안전빵’ 상품에 굴린다. 이 때문인지 퇴직연금 가입자인 근로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의 퇴직연금이 DC형에 들어 있는지, DB형에 들어가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근로자가 있을 정도이다. DC형을 선택한 근로자들의 90% 이상도 원금보장 상품에 가입하고 있다.

사실 근로자들 한테 퇴직급여는 노후에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존재다. 퇴직급여를 일시금으로 찾아 급한 대로 써버리면 노후에 어찌되는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고 저금리가 장기화함에 따라 원금보장형의 쥐꼬리만한 금리로는 노후에 쓸 연금을 만들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 쯤도 안다. 그러나 주식이나 펀드 등 실적배당 상품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이야기를 언론등을 통해 매일같이 듣는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것일까. 은퇴하고 나면 후회할 게 뻔한 데도 말이다.

노년 빈곤을 피하려면

행동경제학은 이를 ‘현상유지편향’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다. ‘고집의 오류’라고도 부른다. 특별한 이익이 없으면 현재의 행동을 잘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상유지편향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발생할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생기는 심리상태다. 그러나 현상유지편향 때문에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더 좋은 대안을 찾지 않고 하던 대로 하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제도는 인간이 만든 위대한 복지제도 가운데 하나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직장인은 채권이나 은행예금같은 안전한 자산을 선택할 수 있고 주식처럼 조금 위험한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좋은 기회다. 나이가 젊다면 공격적으로 주식에 투자하다가 나이들면 안전한 곳으로 옮겨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실제 이런 방식으로 투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처음에 안전한 상품을 선택했던 사람은 죽으나 사나 안전 상품 일편단심이다. 70%가 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한다. 투자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유지편향 때문에 퇴직연금제도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정부는 세제혜택을 강화하는 등 유인책을 내놓고 있지만 가입자들 스스로가 변하지 않는 한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전망이다.

심리학에선 사람들이 단기간엔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지만 장기적으론 하지 않은 행동을 더 후회한다고 말한다. 20~30대에 노후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단기적으론 아무렇지 않겠지만 말년에 반드시 후회하게 돼 있다. 이를 역이용하면 노후준비를 방해하는 심리를 고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 나타날 결과를 상상하는 것이다. 노년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거나 운동 부족으로 건강을 잃게 되는 장면을 그리다 보면 평생 후회하며 사는 것보다 뭔가 하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닫게 된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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