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의 불상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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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생을 제도해야할 스님들이 살상까지 저지르다니….
6일 낮 설악산 신흥사에서 벌어진 불상사를 보는 세인의 느낌이다.
사람들이 모여 운영하는 만큼 불교단체라고 갈등이나 내분같은 것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볼 수도 있다.
구성원 가운데 극히 일부가 저지른 사건을 갖고 한 단체가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계의 주도권 싸움과 같은 불미스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충격과 함께 실망을 금하지 못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일반의 신망이랄까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살인까지 부른 신흥사의 불상사도 과거 불교계의 분쟁과 그 맥을 같이한다. 주지가 바뀌면 직책을 쫓겨나 떠돌이중의 신세를 면할 수 없게되는 스님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극렬한 투쟁을 벌인다는 게 불교분쟁의 기본 양태였다.
재산이 많은 사찰일수록 쫓겨나지 않으려는 쪽의 투쟁은 집요하다. 이른바 「해결사 승려」까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흥사에서 살인을 저지른 승려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으니 승려지재래파에 의해 고용된 「해결사 승려」일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폭력전과가 있거나 완력이 뛰어난 해결사 승려는 사찰측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돈이나 직책을 약속하고 고용하다시피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치안본부는 해결사 승려에 대한 일제단속령을 내렸다지만 문제의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계의 해묵은 속세적 이해다툼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속인들의 단체일지라도 폭력이 묵인되거나 용서되지 않는 터에 중생을 제도하여 진리의 심안을 열게한다는 불교계에서 흉기를 휘둘러 살상까지 일으켰다는 것은 어떤 구실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승려들의 덕행을 비웃는 속언에 『중이 고기맛을 보면 법당안의 파리도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정신세계의 심오한 진리를 터득하려는 승려의 수행이 무너지고 나면 속인이상의 몰골을 할 수도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분쟁이 벌어지는 절은 대부분 유명한 관광지를 끼고있는 재정형편이 좋은 절들이다. 재산이 많은 사원일수록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데서 불교분쟁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삼독, 즉 탐(욕심), 진(화를 내는 것), 치(우둔함)를 벗어나기 위한 극기와 각성이 수행이며 그런 수행을 위해 승려가 되는 것이 아닌가.
승려가 물욕을 알고 거기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은 불교의 원초적 계율을 무시한, 수행의 근본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건은 법적차원에서 다루어져 공정한 처결이 있을 것으로 믿거니와 문제의 보다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불교재단의 자체적인 분발과 노력이 요구된다. 주지의 이동에 따라 떠돌이중들이 생기는 것이 분쟁의 원인이라면 보다 합리적인 인사방안이 이 기회에 강구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신흥사의 재산관리권은 행정당국에 넘어갔다. 무엇보다 종교단체의 명예를 위해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의 개입은 불교분쟁이 자초한 것이다. 이 점 두고두고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이번 불상사가 불교계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척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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