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새지도|은행을 잡아라②|존립·세력확장에 필수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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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재벌들의 싸움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전자·기계등 첨단산업부문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시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이 알찬 경영>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는 수출실적을 놓고 피눈물나는 경쟁을 벌였다가 70년대 후반에는 거창한 중화학대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부를 겨루었던 재벌들이 금융부문 패권다툼에 나섰다.
이러한 싸움은 81년 한일은의 민영화를 서막으로해서 한미합작은행 설립추진과 작년 제2금융권의 활성화조치로 절정에 달했다. 정부가 「획기적인 금융질서의 개편」을 위해 나머지 시중은행의 소유지분을 차례차례 매각하기 시작하면서 금융시장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벌들이 은행마저 나눠먹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주인있는 은행을 만들고 그 주인들의 의사에따라 건실한 은행경영이 가능하도록 하기위해서 민영화를 더 이상 늦출 수는 없다고 정부는 맞섰다.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무엇 때문에 은행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가.
대우의 김우중회장은 81년 시무식에서 임직원들에게 『80년대 후반의 기업운영은 금융시장에서의 승부로 결정될 것이다』고 금융시장 참여의 집념을 토로한바있다. 금융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
지금까지 원로경영인들의 뒤편에 서서 참여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던 동부그룹 김준기회장이 최근에 한말은 새겨들을 가치가있다. 『국제적인 기업으로 뜻을 펴기 위해서는 금융업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동부가 이끌어가고있는 여러업종의 어려운 문제들을 비교적 쉽게 풀어가고 국내외에서의 공신력을 쌓기 위해서 금융업 진출을 꾀해왔다.』
재벌에 있어서 금융은 자신의 존립과 세력확장에 없어서 안될 무기가 되었다. 이같은 생각은 「적자가 나도 하느님은 결코 도와주지 않는다」는 기업의 냉정한 생리에서 터득된 것이며 「돈줄이 막히면 그날로 문을 닫는다」는 은행의 생사여탈권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겠다는 오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지난 몇 달 동안 금융기관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한 몇몇 건설업체들이 있다.
주로 중동에 진출한 이들이 대출금을 회수하려는 단자회사 앞에 꼼짝못하고 궁지에 몰렸다.
심지어 도산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다못해 상호신용금고라도 하나 거느렸더라면 어떻게든 어려운 때를 견뎌내지 않겠느냐며 해당기업들은 후회막급한 표정들이다.
79년 연말께 강력한 긴축으로 어지간한 대기업조차 위기를 겪고 있을때 대우가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동양투자라는 계열금융기관의 덕도 컸다.

<샛강 투신한 신용욱>
사실 대우만큼 금융에 일찍 눈을 떴고 또 이용기술이 뛰어난 그룹도 드물다. 오늘날 대우가 있기 까진 금융에 크게 힘입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도산은 은행창구가 막히는 즉시로 일어난다는 뼈아픈 경험들은 우리주변에 수없이 널려있다.
지난61년 한강 샛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리나라 민항(KNA)의 개척자 신용욱씨의 비참한 말로는 적자운영에 따른 은행의 냉대로 빚어졌다.
70년대 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원풍산업 이상정씨의 경우 은행감독원의 비업무용 부동산매각지시에 불응, 신규대출이 중단되자 결국 사업체를 국제상사에 넘겨주고 말았다. 화신의 박흥식씨나 동명목재 강석진씨는 과욕에 의한 사업확장과 주거래은행의 구제금융 거절로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제2의 대우」를 겨냥하여 급성장한 율산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게된 것은 단자회사들이 일시에 대출금을 회수해버렸기 때문이다.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마저 외면했다.
무서운 젊은이들로 통하는 제세·대봉그룹의 주인공들은 황당무계할 정도로 사업을 확장,대출을 맡았던 지방은행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고 끝내 도중하차했다.
73년2월 정부는 상업은행 증자 신주에 대한 인수권을 포기하고 실권주를 한국무역협회에 양도하는 한편 보유주식도 매각함으로써 명목상 1개 시중은행의 민영화를 단행했다. 그후 시은의 대형화방안의 하나로 서울은행과 신탁은행을 통합했으며 81년에는 한일은을 민영화했다.

<「구제」거절로 침몰도>
작년부터 5개 시중 은행 중 나머지 3개 은행의 민영화는 『금융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않은 우리나라 형편에서 대기업의 은행참여는 어쩔수 없다』 (82년10월 강경직재무장관의 국회답변)는 방침에 따라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은행민영화의 결과로 지난4월 현재 현대그룹은 서울신탁은행의 총발행주식중 12%를 차지했으며 이밖에 한일은 11.7%, 제일은10.3%등 자본금 1천억원을 넘는 3개시은에 대해 10%이상의 주식을 갖고있는 대주주로 부상했다. 자본금이 2백억원인 강원은행에 대해서는 32.7%로 단일 지배주주가 되었다.
삼성그룹은 상은16.6%, 조흥은 10.3%, 제일은 6.5%이며 대구은행의 대주주로 참여하고있다.
대우그룹의 경우 제일은 14.4%로 절대 대주주가 된 이외에 한미은행과 충북은·광주은도 거느리게 되었다.
행여 뒤질세라 금융산업부문에 뛰어든 럭키금성그룹도 제일은8.5%, 한일은 7.4%의 지분을 획득했다.
이밖에 한진·태광산업·국제·대림·신동아·한국화약·동국제강·코오롱·롯데·한일 합섬·금호·효성·미원·삼양두등도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돈을 금융기관에 투자했다.
단자회사와 종합금융등을 포함한 금융기관의 출자액(4월말현재)을 통틀어 보면 현대가 4백7l억원으로 제일 많고 다음이 삼성 4백6억원, 대우 2백29억원, 럭키금성 2백25억원이다.
특히 계열기업의 수가 비교적 적은 태광산업과 동국제강그룹 등이 각각 1백96억원, l백16억원씩을 금융기관에 출자하고 있어 재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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