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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세금 문제, 후세를 생각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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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제대로 된 국가라면 그 국민은 세금 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세금 많이 내는 사람이 많은 존경을 받는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정은 받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는 아직 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위해 쓰이겠지'라는 마음 든든함과 만족감보다는 "이 돈 버는 데 정부가 보태준 거라도 있나"라는 억울한 느낌이 앞서는가 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마당에 세금 깎아 준다는 걸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요즘 국회에서는 감세논쟁이 뜨겁다. 보다 정확하게는 감세 주장과 지출 확대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야당은 9조원의 감세를 해야 경기가 살아나고 경기가 살아나야 서민생활도 숨통이 트인다고 한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감세는 부자들과 중산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뿐, 세수가 줄어들면 서민복지에 쓸 돈도 줄어들므로 차라리 2조원을 더 걷어 정부 지출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어떤 쪽의 효과가 더 클지는 알 수 없지만 양쪽 다 일리는 있다.

국민은 자신이 서민층이냐 중산층 및 부유층이냐에 따라 감세 지지와 지출 확대 지지로 자연스럽게 심정적으로 편이 갈라지게 되어 있다. 게임이론적 분석에 따르면 이런 경우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기보다 적당한 감세와 동시에 적당한 지출 확대를 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일단은 양쪽 모두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결말이 재정적자의 확대를 통해 미래 세대의 부담을 늘린다는 데 있다. 미래 세대는 감세가 뭔지 대형 국책사업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된다. 말이 거창하게 미래 세대지 지금의 초.중.고교 학생, 어린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들이다. 25년간 공적자금을 상환하는 계획을 만들면서 금융위기가 왜 생겼는지도 몰랐던 이들로 하여금 전체 부담의 44%를 떠안도록 한 것이 재작년이다. 게다가 그들이 사회에 나가 본격적으로 세금을 내기 시작하는 10년 뒤부터는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 숫자 자체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한다. 세금을 내는 사람이 줄어드는 여건에서는 세수가 늘어나기 극히 어렵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천문학적 장기 재정지출계획이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다. 공적자금으로 투입한 156조원도 너무 많다고 놀랐었는데 국책사업을 모두 합하면 700조원이 넘는다고 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던 차에 매년 9조원씩 감세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과연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남기지 않으면서 이 모든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계산이 서지 않는다.

서민층과 중산층 및 부유층 사이의 이해 상충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의 이해 상충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미래 세대의 의견이 투표로 연결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의 입장을 배려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 된 도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최빈국에서 몸을 일으켜 선진국 문턱에까지 가도록 만든 부모세대들의 공로도 별로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다. 미래 세대에게 과중한 부담을 남기기라도 한다면 10년, 20년 뒤 그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감세론자들은 9조원의 감세와 동시에 10조원 이상의 지출 삭감을 병행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출 삭감을 병행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지출 확대를 추구하는 측과 게임 상황에 들어갈 경우 감세를 먼저 하고 지출 삭감은 나중에 하게 될 공산이 크다. 진정 미래 세대를 생각한다면 지출 삭감을 먼저 해 놓아야 옳다. 그렇게 해서 남는 돈이 생기면 미래 세대에게 미루어 놓은 공적자금부터 갚아 상환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그때 가서 감세를 논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