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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입맛들인 중공|농업·상업「자영」 대폭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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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공은 이제 「자본주의인민공화국」 인가.
모택동시대의 중공에서는 주자파로 불리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었다. 문화혁명당시 호북성의 한 인민공사회원이었던 「완·밍치」 부자는 연간 2O달러밖에 되지않는 수입을 늘리기위해 꿀벌을 길러 첫회에 50달러정도의 부수입을 올렸다. 그러나「완·밍치」는 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은후 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공은 실권자 등소평의 북소리에 맞춰 새로운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다.
이제 19세가된「완·밍치」와 그의 아버지도 토끼와 검은 담비를 사육, 82년말까지 2만3천달러를 벌어 중공에서는 가장 부유한 농가의 하나가 됐다.
거리와 시장에는 개인소유의 자전거수리점·식품가게·신기료장수·이발소들이 들어서있다.
북경오페라단의 단원들은 국가에서 받는 월급을 내리는데 동의하는 댓가로 입장료수입의 몇%를 배당받기로 했으며 일부작가들은 인세로 생활비를 충당하라는 지시를 받기도했다. 하남성의 은퇴한 의사들은 개인병원을 차리고 있다.
수천개의 인민공사는 가족들이 경영하는 농장으로 나뉘었으며 농부들은 여가시간에 팔수있는 물건을 만들도록 격려받고있다.
북경주재 한 유럽외교관은 『오늘날의 중공을 5년전과 비교하면 이제 중공인들이 대거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다고 결말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신중국」의 이념적 기반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반드시 제거돼야할 자본주의 잔재」 라고 조소받던 시장경제가 중공의 계획경제에 접목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새로운 경제바람은 등소평의 고향인 사천성에서도 여실히 찾아볼 수있다.
77년부터 82년까지 가난하고 혜택을 가장 덜받는 인구의 약 80%가 살고있는 시골의 생산고는 3배로 늘었고 농민1인당 연간소득은 배로늘어 1백30달러에 이르렀다. 지난해의 농업생산고는 11% 증가, 기록적인 곡물수확량을 냈다.
농촌의 경제사정이 호전됨에 따라 가내공업이 전국적으로 발달되고 벽돌·유리·농기구· 의류등이 시골에서 생산되고있다.
정부관리들은 이같은 농촌의 생산성증가가 처벌보다는 보상위주의 「책임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라며 이를 도시로까지 확대시킬 계획이다.
중공전체농장의 90%이상이 채택하고 있는「책임제도」란 어려운 일에 대한 보상제도를 말한다. 어떤 국영공장에서는 생산단위당 임금지불원칙을 따르고있어 부지런한 노동자는 게으른 동료보다 더많은 돈을 벌수있다.
정부는 또 이른바 「개인기업」의 부활을 장려하고 있다. 북경에서 봉재교사로 일하던「우·휘난」은 문화혁명기간중 홍위병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고 교습재료를 몰수당했다. 그러나 「우」부부는 81년 봉재학교를 다시 열고 지금은 자봉틀 26개를 갖고 있다.
중공의 경제개혁은 또한 중공이 통일되기전「부르좌」로 불리던 자본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제공해 주고 있다.
50년대 중반 회사를 뺏기고 문혁기간중 시골로 숨어들었던 이들 「자본주의자」들은 지금 국영 또는 개인기업의 고문으로 일하기도 한다.

<뉴스위크·8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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