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태권도교관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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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4년10월10일 붕타우에 태극기가 계양된것 보다 1주일쯤 먼저 태권도교관단이 파견된 월남군 보병학교(투둑), 해군사관학교 (나트랑), 육군사관학교(달라트)에서는 우리말 구령에 따라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올려졌다.
보병학교에서는 백준기단장을 비롯, 김봉규대위 (육사l5기·현역대령) 추교일·임경환대위등 4명이 1백명의 월남군태권도교관요원과 일반시민 8백명에게 태권도를 가르쳤으며 나트랑에서는 이대희대위(육사15기·현역소장)와 박양규·곽주환대위가 2백50명의 해사생도에게, 그리고 달라트육사에서는 사관학교생도시절 태귄도부장을 지냈던 유형선대위 (육사15기·중령예편) 와 임승해·김수연대위가 8백50명의 생도와 민간인 2백명을 수련시키고 있었다.
태권도교관단들은 처음 월남인들에게 태권도를 영어로 가르칠것이냐 우리말로 가르칠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태권도 기술만을 보급하는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의 얼」 을 심는데 더 큰 뜻이 있다는 결론이 나와 모든 구령을 우려말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교관들이 무적 애를 먹었지만 구령과 함께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보여주어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가 무슨 말인지를 가르칠 수 있었다.
교관들은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수없이 반복하는 바람에 목이 쉴 정도였지만 얼마후 『경례』 하면 수련생들의 손이 얼떨결에 이마위로 올라가는것을 보고는 한없이 기뻤다고 한다.
한국의 태권도에 월남인들이 매력을 느끼게 된것은 57년「고·딘·디엠」월남대통령이 이승만대통령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면서부터 였다고한다.
휴전선일대를 시찰한 「고·딘·디엠」대통령은 6군단에 들려 29사단의 태권도연무시범을 참관, 『백병전에 가장 좋은 무기가 되겠다』 면서 탄복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귀국후 대사관을 통해 태권도시범단을 월남에 정식으로 초청했다고한다.
59년3월2일 최홍희육군소장을 단장으로 각군에서 선발된 16명의 시범단이 월남에 가 3군사관학교를 순회하며 시범을 보였다.
시범단이 1주일동안의 일정을 모두 끝내고 귀국하기 위해 독립궁으로 「고·딘·디엠」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고·딘·디엠」 대통령은 군인들에게만 보여줄것이 아니라 일반국민에게도 보여주어야한다면서 이대통령에게 태권도시범연장요청 전문까지 보내 시범단이 1주일간 더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
백소령을 포함해 10명밖에 되지않는 태권도교관단의 가장 큰 어려움은 태권도수련생을 무한정 받아들일수 없는것이었다고 한다.
사관학교에서 정규수업이 끝나면 저녁에 다시 지역별로 공설운동장등에 시민들을 모아 놓고 태권도를 가르쳤지만 날이 갈수록 지원자가 늘어나 인원수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월남에서는 태권도를 배우는데도 「빽」 이 동원되어 『태권도는 아무나 배우는것이 아니다』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월남군총사령부 군수참모였던「욘」장군은 백준기단장에게 아들 셋을 직집 데리고와 제자로 키워줄것을 간청했으며 지방유지들의 부탁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교관들의 위치가 굳어지자 지방유지들은 우리교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것을 「권세의 심벌」 로 생각하게끔 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붕타우에 있는 월남 공수특전단장이 백단장을 찾아와 공수부대대에도 태권도사범을 파견해 주어야 자기체면이 서겠다고 요청했다.
백단장은 이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도 없어 나트랑에 있던 이대희사범에게 붕타우 책임을 맡기고 그곳 이동외과병원에 근무하던 사병중 태권도 유단자인 홍도중사 (2단) 와 오칠남하사(2단)을 교관으로 임명해 실제 태권도 교관은 10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백단장은 65년롬 월남군 체육학교교장이며 월남체육계 원로인「꾸」소령을 앞장세워 태권도협회를 결성시킨 뒤 사이공·나트랑·달라트·붕타우등 4개도시에 한국 오도관·책도관·정도관·지도관·송무관등의 지관을 설치해 주었다.
65년6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구엔·카오·키」수상도 사이공 오도관도장에서 태권도를 틈틈이 배워 명예초단을 땄다고한다.
「키」 수상은 교관단의 임기가 끝날즈음 한국정부에 이야기할테니 교관단이 그대로 월남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제1차 교관단은 『우리는 임기가 끝나면 교대하는것이 원칙』 이라며 65년11월6일 귀국했다.
그후 2차 태권도교관단 10명은 다시 월남에 파견되었으나 비둘기부대소속으로 흡수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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