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 꺾은 박영훈 "아직 배고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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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박영훈 9단(오른쪽)이 물가정보배에서 2대0으로 우승하며 이창호의 벽을 처음으로 넘어서고 바둑계의 왕좌 쟁탈전에 가세했다. [한국기원 제공]

박영훈 9단의 청룡도가 가을 햇빛을 받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11일 그 칼춤 아래 천하 명장 이창호 9단이 쓰러졌다. 박영훈이 이창호를 2대0으로 격파하고 우승한 물가정보배는 올해 시작한 기전이고 6단 이상만 출전한 제한기전이다. 우승상금은 2000만원에 불과하고 시간도 10분만 주어지는 초속기 기전이다. 그래도 '바둑계 정복'을 꿈꾸는 박영훈에겐 이 승리가 생애의 이정표가 될 만큼 큰 의미를 지닌다. 도전과 좌절을 거듭해온 '이창호의 벽'을 처음으로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창호의 후계 쟁탈전은 이제 이세돌-최철한 양강 체제에서 박영훈이 가세한 트로이카 체제가 됐다. 박영훈은 "일인자가 되고 싶다"는 한마디로 트로이카 체제마저 언젠가는 끝장내겠다는 야심과 자신감을 토해냈다.

박영훈은 2004년 후지쓰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해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현재 한국기원에서 공익근무 중. 공익근무란 다름 아닌 바둑을 열심히 두는 것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승을 축하한다. 이창호 9단을 처음 넘어선 소감은.

"기쁘다. 그러나 속기인 데다 운이 따라줘 이겼을 뿐이다."

-실력이 약간 늘었다는 평가다. 기풍도 공격적으로 바뀐 느낌인데….

"나도 어느 날 문득 내가 공격적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한 일년쯤 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원래 길게 가는 스타일은 아니고 초중반에 승부를 보는 스타일이다."

-이번 이창호 9단과의 대국은 '끝내기의 승리'라는 말이 있다.

"1국은 내가 약간 좋았다. 2국은 팽팽했는데 마지막 중앙 끝내기에서 이창호 9단이 실수했다."(이창호 9단은 최근 계산이 안 된다고 토로했는데 이판에서 그게 사실임이 드러났다)

-세계 바둑계는 그동안 이창호-이세돌-최철한 3명을 '빅3'로 불러왔다. 이 점에 서운한 느낌은 없었나.

"승부세계는 성적으로 말할 뿐이다. 올해 나는 중환배 하나 우승했을 뿐 세계대회에서도 다 탈락하고 한 게 없다. 그러니 불만은 없다."

-그들 3명과 대국할 때의 심정을 솔직히 말해 달라.

"이창호 9단과 대국하면 마음이 편하다. 이세돌 9단과는 조금 더 격렬해지는 느낌이고 친구인 최철한과는 승부의 치열함이 고조된다. 그러나 바둑 자체는 누구를 만나도 그냥 내 스타일 대로 둘 뿐이다."(열살 위의 이창호 9단과는 어려서부터 배운다는 느낌이었기에 편하다. 두 살 위의 이세돌과는 경쟁 상대란 느낌이 있고 동갑의 최철한과는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는 뜻)

-스무 살은 입지(立志)라고도 한다. 무슨 뜻을 세우고 있나.

"이창호 9단처럼 일인자가 되는 것이다."

-이창호 9단의 후계 경쟁에서 이세돌-최철한을 물리칠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심히 하면 기회는 오지 않겠는가."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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