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표씨의 시조는 960년 중국에서 건너온 표대우. 907년 당이 망하고 송이 개국하기까지 53년간중국대륙은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등 군소국가들이 치열한 세력각축장으로 변모했다. 표대우은 당시 후주의 이부상서였는데 959년 나라가 망하자 장,방,위,변,윤,진,감,황보씨등 8성을 인솔해 고려로 피신, 귀화했다고 한다. 이때가 고려광종10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계는 실전되었다.
우리나라 표씨들이 사실상 시조로 만드는 인물은 고려말 열문지후 표인려. 좌리공신 온창(신창의 옛이름)백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신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표씨는 조선조에서 총 5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표계(세종조·현감)와 그의 아들 표연말(연산조·대사헌), 손자 표우(중종조·부사)등은 3대가 나란히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들중 표연말은 뛰어난 문장과 강직한 성품의 명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조선초 사림파의 거유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때 문과에 올라 호당(임금의 특명을 받은 수재들이 공부하는 곳)에 뽑혔던 수재였다. 성종은 강직하고 호방한 표연말을 총애하여『동국통감』편찬에 참여캐했으며 서거정도 그의 역저 『필원잡기』 의 서문을 부탁할만큼 문장에 빼어났다.
연산군 원년에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했던 그는 직제학을 거쳐 승지·대사성등을 역임했다.
<후주에서 귀화>
승지라면 지금의 대통령비서관이다. 그는 연산을 모시는 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연산의 비리를 따지려는 신법때문에 정치적 화를 입는다. 연산군의 온갖 비행과 패륜을 보다못한 그는 죽음을 불사하는 직언으로 왕을 연하는 상소를 되풀이했다. 그의 상소문 가운데는 『오조소』가 유명하다.
그것은 『왕이 학문과 도덕을 멀리 하고 유희만을 즐기는 것은 삼가야하며, 간신배를 멀리하고 현자를 신임할 것이며 충신의 옳은 의견을 들어 채택하고 죄없는 사람을 벌주지 않고 친척등 개인의 정에 얽매이지 않아야한다』는 충언인 동시에 연산군의 비행을 질타하는 칼날같은 직언이었다.
그의 재치와 기지를 잘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연산군이 기생들과 함께 한강에서 희희낙락하던 어느날, 그는 연산의 모습을 보다못해 이런 일은 군주가 할일이 못된다며 극구 만류했다. 이 충언이 연산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대로한 연산은 뱃사공을 시켜 그를 물에 빠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패륜의 왕일지라도 일국의 대신을 함부로 죽일수는 없는 법. 연산은 그를 건져올리게 한다음『왜 물에 빠졌느냐』고 야유조의 질문을 던졌다. 이때 표연말은 태연자약 웃으며 『중국 초나라 굴원(왕이 자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자 물에 빠져 숨진 충신)의 충절을 따르려 했읍니다』고 대답했다.
노기에 가득찬 연산이『그렇다면 굴원을 보았는가』 고 물었다. 표연말은 태연히『예, 만났읍니다. 그런데 굴원이 말하기를, 나는 어리석은 왕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으나 너는 총명한 왕을 만났으니 좋은 일을 많이하고 오너라 했읍니다.』이 재기넘치는 답변에 폭군 연산도 어이가 없었던지 허허 웃고 말았다한다.
그는 결국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원으로 유배도중 은계역에서 숨졌다.
죽은지 6년뒤 갑자사화때는 부관참시당하는 형극의 생을 살아야했다.
그러나 중종때 모든 관작이 복직되고 명예를 되찾았다. 중종은 직접제문을 지어 유배지에 잠든 그의 시신을 선산이 있는 상주 함창으로 옮겨 국상으로 장사를 치르게했다한다.
『「신하의 도리는, 왕이 듣고 안듣고 간에 사단이 생기면 진언하는 것」이라고 외쳤던 서릿발같은 선비의 기개. 그것은 표연말이 후손들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이라고 표상용씨(신창표씨중앙화수회장·대구산업사장)는 말한다.
이밖의 이들로 표찬(중종조·울산부사)과 그의 둘째아들 표헌(관조조·역관)등이 있다. 표헌은 임진왜란당시 선조를 호종, 평북 용만에 이르러『조선에 남을 것인가, 요동으로 피신할 것인가』를 놓고 군신간에 격론을 벌일때 요동피신을 절대반대한 공으로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추훈되었다.
왕이 백성을 버리고 조직을 등질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광해조때 지중추였던 표정노는 외아들이다.
표정노는 당대의 명역관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옛날 중국의 사신들은 대체로 오만하여 자기네의 학문이나 문장이 항상 우월한 것으로 앝고 우쭐대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중간에서 통역하는 역관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양국의 외교를 좌우하기도 했다.
선조때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게되자 표정노는 원접사(사신을 영접하는 관리)의 역관이 되어 평안도 의주까지 마중을 나갔다. 명나라 사신은 연회석상에서 은행알을 불에 구워 먹다가 문득 이쪽의 실력을 떠볼 생각이었던지 『은행갑중 장벽왕(은행껍질속에는 푸른 구슬을 감추고 있구나)』이라고 시 한 구를 읊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표정노가 곧 이를 되받아『석류피리 점주사 (석류껍질 안에는 주사가 점점이 박혀있구나)』라고 역시 시로써 화답했다.
이에 명의 사신은 역관의 실력이 이쯤인데 원접사의 실력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 태도를 바꾸고 공손해졌다고한다.
조때의 무관 표정준(첨절제사·현감)은 청음 김상헌과 절친했는데 병자호란이후 척화신으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는 청음을 끝까지 수행한 의리의 사나이였다.
표씨는 「신창」단일본으로 전국 약2만명, 성별인구순위 77위의 희성이다.
지난 81년 발족한 신창표씨화수회는 전국 표씨의 결속을 다지는 중앙기구. 창립초부터 2천만원의 장학금을 조성, 문종에서 매년 5명씩의 인재를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82년에는 「대동보」와 「남계(표연말의 호)선생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올해 화수회의 역점사업은 관향인 신창면에 중시조 표인려의 유허비를 건립하는 일. 총예산은 3천8백여만원. 지난달23일 기공식을 가졌다. 『학성산시슭에 신창표씨의 성역을 세우는 대사업』이라고 표현기씨((주)주일상사대표이사·화수회중앙부회장)는 말한다.
거창중·상업고등학교 설립자 표현태(제헌국회의원·작고), 전서울대통대학장 표현구씨등이 해방후 표씨문중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글 김창욱·사진 양영훈기자>글>후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