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청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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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멜러드라머 같지만 그것은 실화였다. 애인에게 달려드는 7, 8명의 불량배들을 상대로 격투를 벌인 청년이 살인까지 했다. 그러나 검찰은 일단 『정당방위에 가깝다』는 정황을 참작, 불구속입건했다.
이런 이례적인 일이 주위의 공감을 사는 일도 또한 이례적인 것 같다. 그만큼 늘어나는 범죄에 대한 시민의 혐오감이 높아가는 반증이기도 하다.
형법 21조는 정당방위를 세 항목에 걸쳐 용인한다. 첫째 상당한 이유가 있는 방위행위는 정당방위로 무죄. 둘째 정도를 초과하는 방위행위는 과잉 정당방위로 형을 경감. 세째 과잉 정당방위라도 공포·경악·흥분·당황 때문이라면 무죄.
그러나 실제의 판례는 정당방위의 개념을 매우 좁게 해석한다. 사회통념상 방위행위로 인정할 수 있어야 정당방위가 된다는 것. 정당방위를 구실로한 폭력의 난무를 막기 위해서다.
이런 판례가 있다. 71년 4월30일 대법원 판결. 『싸움은 방어행위인 동시에 공격행위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므로 이는 정당방위 또는 과잉방위에 해당할 수 없다.』
이 판례대로라면 애인을 지키려던 청년의 용기는 정당방위로 용인받지 못한다. 격투는 곧 싸움이며 싸움 끝에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비단 이번 경우뿐만 아니라 싸움을 유발하는 방위행위는 극단적으로 말해 정당방위가 못된다는 얘기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용기는 항상 문제가 된다. 기독교의 기본 덕목(cardinal virtues)은 일곱가지, 정의·신중·절제·용기·신념·희망·자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커리지(courage)가 아니라 포티튜드(fortitude)다. 전자가 담력과 배짱을 뜻하는 용기라면 후자는 불굴의 정신·인내를 뜻하는 용기다.
결국 이 청년의 용기는 종교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종교와 법리를 떠나 훨씬 더 절박하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FBI통계 (79년)에 따르면 24분마다 살인, 7분마다 강간, 10초마다 강도, 29초마다 자동차 도난사고가 일어난다.
범죄의 만성화는 시민의 용기마저 위축시킨다. 얼마전 미국의 한 당구장에서 여인이 집단추행을 당하는 장면을 옆에 사람들이 지켜본 예도 있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다. 소매치기 당하는 장면, 날치기나 폭행의 현장에 있는 시민들이 범죄를 보고도 꿈쩍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끔 나타나는 용감한 시민이 있다. 법은 과연 이들을 얼마나 보호할수 있는지 궁금하다. 용기 있는 정당방위마저 법이 외면한다면 착하고 순한 시민들의 설 땅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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