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진 수요일] 청춘리포트 - 썸과 연애의 경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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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 듯 말 듯한 손, 줄 듯 말 듯한 마음. 영화 ‘오늘의 연애’에 출연한 배우 이승기·문채원씨가 ‘썸’을 표현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썸’이란 말은 요즘 청춘의 전형적인 사랑 방식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그 뜻부터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영어 ‘썸씽(something)’의 준말로 남녀 간 서로 호감을 주고받는 상태. 좀 더 쉽게 풀어볼까요. 가수 정기고와 소유가 부른 ‘썸’이란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니 꺼인 듯 니 꺼 아닌 니 꺼 같은 나’. 한마디로 연인인지 친구인지 알쏭달쏭한 상태가 바로 썸입니다. 어쨌든 남녀 간 호감을 뜻하니 이 말의 뜻빛깔은 핑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썸’의 뜻빛깔은 칙칙한 회색에 가깝기도 합니다. 요즘 청춘들이 미래가 불안해 선뜻 사랑을 고백하기를 망설이면서 ‘썸타는 관계’로만 남기를 선호한다는 측면에서 말이죠. 영화 ‘오늘의 연애’에서 썸타는 관계를 연기한 배우 이승기·문채원씨와 20~30대 대학생·회사원 6명이 둘러앉아 ‘썸’이란 말에 비친 청춘의 자화상을 이야기했습니다.

8일 오후 서울 왕십리 CGV 옆 카페에 청춘남녀 8명이 모였다. 20~30대의 샤방샤방한 젊은이들은 연애깨나 해본 이들이다. 연예인, 회사원, 대학생으로 하는 일은 서로 달라도 아낌없이 몸과 마음을 던졌던 사랑, 수렁 같은 실연,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통해 성장한 우리 시대 청춘들이다. 이들의 입을 통해 ‘썸’과 ‘연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연인같이 행동하지만 연인은 아닌 애매한 관계를 가리키는 ‘썸’을 두고 각자의 연애관이 부딪혔다.

2030 대학생·직장인·연예인 8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썸에 대한 얘기를 나눈 이들은 ‘그래도 썸보다는 연애’라고 입을 모았다. 왼쪽부터 채누리·최대일·이주원·이승기·문채원·박태순·윤지윤씨. 신한나씨는 사정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썸을 정의한다면.

 이승기(28·이)=“‘사귀자’고 하고 ‘그러자’라는 답을 들으면 연인, 그렇지 않으면 썸.”

 문채원(29·문)=“친구들에게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연인이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느냐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느냐의 차이가 크다.”

 윤지윤(28·윤)=“구속이 가능한 관계면 연인, 그렇지 않으면 썸이다. ‘왜 이렇게 늦느냐. 다른 남자 만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으면 연인이라고 볼 수 있다.”

 - 연인 대신 썸을 택하는 2030이 늘었을까.

 문=“두려우니까. 연애를 많이 한다고 해서 이별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외롭고 호감 가는 상대가 1년에 한두 번은 나타나니 무게감이 덜한 썸을 택하는 게 아닐까.”

 박태순(27·박)=“연애에 대한 부담이 예전보다 커졌다. 취업준비로 버겁고 돈 모으기 바쁘니까 사랑이란 감정을 사치스럽다고 느끼는 거다. 그런데도 이성을 향한 본능은 억제하지 못하니 썸이 탄생한 게 아닐까.”

 이=“경제적 문제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굉장히 공감된다.”

 신한나(30·신)=“썸은 어장 관리의 다른 말일 뿐이다. 둘 중 하나는 좋아하는데 한 사람이 덜 좋아하거나 확신이 없을 때 선택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윤=“내가 좋으면 썸이고 내가 싫으면 어장관리!”

 최대일(26·최)=“여러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데 확신은 안 서고. 상대가 계륵같이 느껴질 때 썸을 탄다.”

 문=“그럼 스킨십은 말아야지.”

 얘기는 자연스럽게 스킨십으로 옮겨갔다. 썸을 다룰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이 바로 스킨십이다. 스킨십을 ‘연인의 특권’이나 ‘애정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썸 관계에서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문=“키스까지. 보수적이고 개방적인 걸 떠나서 분위기가 흘러가면 키스는 가능할 것 같다. 그 이상은 욕심!”

 이=“나는 키스하면 썸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턴 연인이 될 거냐, 관계를 접을 거냐를 선택하는 시기가 오는 거지. 아! 오히려 손 잡는 게 키스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키스는 분위기에 이끌려 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따귀 한 대 맞고 끝나지만, 손은 잡았다고 여자가 바로 뿌리치지도 않을 거고 서로 교감이 된다. 남자가 상대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손으로 마음을 표현하거든.”

 이주원(25·원)=“키스가 관계의 정립 계기라는 말에 동의한다. 키스하고 헤어지면 다음날 ‘어제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보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행동하면 그땐 관계를 끝내야지.”

 이=“아침까지 말이 없다면 그건 이미 끝난 거지. 여자가 집에 들어가면 바로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냐.(웃음)”

 그렇다. 상대를 좋아하는데 연애 대신 썸을 선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소유하고 싶은 게 사랑의 본질이니까. 썸은 그래서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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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썸 때문에 가장 지쳤던 경험이 있다면.

 신=“키스하고 연락이 없는 경우. 공식 연인이 아니었지만 꽤 배신감이 든다.”

 문=“하룻밤을 보내고 나서도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채누리(채)=“영화 ‘오늘의 연애’ 중 이서진씨가 맡은 역할이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쪽지를 보내고 데이트하고 ‘애정 있다’고 하면서도 ‘난 널 책임질 수는 없다’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사람. 상반된 메시지를 보내 좋아하는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묶어두는 건 문제다.”

 원=“친구 하나는 남자가 성관계를 계속하는데도 사귀자는 얘기를 안 했단다. 남자가 떠날까봐 ‘우리가 어떤 관계냐’고 묻지도 못했다더라.”

 -이도 저도 아닌 썸. 끝낼 방법은 없을까.

 최=“난 네가 좋은데 넌 어떠냐고 직접 물어보는 게 정석이다.”

 신=“제3자가 연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썸타는 상대에게 ‘고백받았는데 어떻게 할까’라고 물었을 때 ‘만나봐’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끝났다고 봐야지.”

 대화 말미에 문채원씨는 ‘사랑에도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얘길 꺼냈다. “누군가에게 고백했을 때 그 사람이 싫다고 해도 ‘내가 너의 취향이 아닐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문씨의 말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두렵다고,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주저하는 대신 불나방처럼 사랑을 향해 돌진하는 게 청춘의 본질이니까.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진행·정리=채윤경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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