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나무가 되고 뻐꾸기 소리도 낸다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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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 연극의 출연 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있다. 신청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 할까 열심히 연습한다. 그런데 막상 오디션 현장에 오니 엉뚱한 지시가 떨어진다. 우선 심사위원이 박수를 친다. "짝짜라 짝짝 짜아짝" 그러더니 똑같이 따라해 보란다. "쿵쿵 쿠우쾅 쿵쾅"하고 발을 구르더니 그것도 그대로 재현하란다. 심지어 휘파람을 얼마나 잘 부는지를 점수에 반영한다. 리듬 감각을 가장 중시하며 연기 심사는 별반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이런 어이없는, 아니 괴이한 오디션을 통해 출연진를 선발한 작품이 바로 '왕세자 실종사건'(작 한아름.연출 서재형)이다. 11일부터 2주간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2년전부터 예술의전당이 진행하고 있는 '자유 젊은 연극 시리즈'에 올해의 작품으로 뽑혔다. 연출가 서재형씨는 지난해 데뷔작 '죽도록 달린다'로 동아 연극상을 수상한 신예 감독. 그는 배우들에게 "연기뿐만이 아니라 무대장치와 소리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며 '연기력'을 넘어선 '활동력'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또 이런 말도 덧붙인다. "잘 짜여진 대본으로 배우들을 연습시키면 3일 만에 작품 나온다. 그런 것으로 과연 배우가 살아 움직인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난 끝없이 배우들과 토론하고 논의하며 대본을 수정해 왔다. 각각의 상황에서 배우들의 감성과 논리를 최대로 뽑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공연 전날까지 계속 변화되고 꿈틀거릴 것이다."

'왕세자…'은 조선 시대가 배경이다. 어느날 갑자기 왕실의 아기씨가 사라진다. 궁안은 발칵 뒤집힌다. 범인을 추적하다 구동이란 내시와 자숙이란 나인의 로맨스가 발각된다. 동성애 코드도 등장한다. 사건의 불똥은 결국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내시가 과연 남성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데로 나아간다. 왕세자를 찾아내야 하는 본래의 시작점에서 사건은 점점 멀어진다. 본질을 놓치고 곁가지에 목매는 현세태를 풍자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처럼 작품의 스토리는 단순하고, 재미있고 약간 코믹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풀어놓는 방식은 까다롭다. 우선 시간이 헷갈린다. 현재와 과거를 숨가쁘게 오간다. 마치 기억 상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영화 '메멘토'처럼 관객들의 추리력을 시험하는 느낌이다. 공간도 파괴된다. 한 곳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하는 동안에도 다른 배우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주변을 서성거린다. 아니면 그곳에서 다른 연기를 하고 있다. TV에 비유하자면 4개의 분할된 화면을 한꺼번에 틀어주는 식이다. 관객은 알아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 되고, 한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무대엔 특별한 장치도, 배경도 없다. 이를 메워주는 게 배우들이다. 배우가 나무가 되고, 주변 환경을 만든다. 게다가 음향 효과도 배우들의 몫이다. 뻐꾸기.부엉이 소리 등을 진짜 음향 뺨치게 소화한다. 유별난 오디션을 통해 '연기력'이 아닌 '활동력'우선으로 배우를 선발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난 맛있게 만든 음식을 관객의 입에 쏙 넣고 싶지 않다. 연극을 긴장하며 보게 하고 싶다. 관객의 상상력이 나의 의도를 뛰어넘길 바란다." 마치 관객과 고도의 심리전이라도 한판 벌일 태세다. 이런 도전 정신 때문에 '왕세자…'을 올 하반기 최고 문제작이라 평가하는 듯 싶다. 문의 02-580-1300.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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