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7백만원짜리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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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연설문 라이터였던 칼·헤스는 15세부터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학교가 그렇게 싫었느냐고 누가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난 교육을 좋아했읍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시간밖에 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자면 지금 당장 학교제도를 바꿔야할 것입니다] 미국대학의 교육비는 연간 평균5백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한국대학의 경우는 2백만원. 생산비가 싸다고 곡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육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싸게 먹힌 만큼 제품의 질이 떨어지기 쉽다.
그런 뜻에서 한국에서 유치원에 들어가 대학을 나올 때까지의 1인당 교육비가 1천6백94만원이나 든다는 돈육개발원의 조사발표는 새삼스레 우리를 놀라게 한다. 같은 날 대학생 몇명인가가 버젓이 프로 축구팀에 끼어 경기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보도되었다는 사실이 또한번 놀라게 한다.

<교육공장의 부실화>
하나는 사회면에, 또 하나는 스포츠면에 나온 것이지만 그 곁으로는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기사들이 경쳐서 은근한 노여움을 안겨준다.
그것은 꼭 과대선전에 홀려 조악한 물건을, 그것도 호되게 비싼 값으로 산 다음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었다.
공장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려면 뭣보다도 시설이며 기술이 좋아야 한다. 좋은 공장일수록 시설과 기술혁신을 위한 투자를 많이 한다.
그러나 무턱대고 시설투자만 많이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적정이윤이 나오도록 해야하고 그러자면 적정생산량을 지켜 생산과잉, 시설과잉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원료가 좋아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학교라는 이름의 교육공장도 이와 조금도 다를바 없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기술이 좋아도 나쁜 원료를 쓰면 질이 낮은 물건 밖에 안나오며 그렇게 되면 시설투자상의 낭비밖에 안된다.
우리네 교육공장에서의 낭비는 수없이 많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한글편지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1학년 학생들에게 제2외국어를 두개씩이나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2학년 때에는 다시 그중 하나만을 골라 배우도록 한다.
이유는 어느 외국어가 적성에 맞는지를 가리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1년 동안 헛 공부를 시킨 것이다.
어느 대학, 어느 학과나 다 똑같이 정원 중 20%인가, 30%인가를 무조건 폐기처분 한다는 것도 기업상식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낭비다. 아무리 최고급 공장이라 할지라도 몇%의 불량품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경영이란 불량품 생산률을 극소화하는가를 말한다. 교육의 참뜻도 이런데 있다. 만약 불량품이 30%씩이나 나온다면 그것은 질 나쁜 천으로 못을 만들려한데 잘못이 있다. 아니면 사이다 생산시설로 맥주를 만들어 내려한 탓이다. 어떻든 부실기업에서나 일어날수 있는 일이다.

<셰도워커의 쓰라림>
또 고급품 고장의 불량품은 때로는 보통 공장에서 내놓는 싸구려 합격품보다 훨씬 좋은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무턱대고 무우 자르듯 베어 버린다면 그처럼 엄청난 낭비는 없다. 그러나 그 낭비는 낭비로 끝나지 않는다.
이반·이리치가 제창한 개념에 셰도·워크 (SHADOW WORK)라는게 있다. 그것은 산업에 봉사하는 일이면서도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내일의 근무를 위한 오늘의 가사노동,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타는 일, 노동에 지친 몸을 고치기 위해 받는 의료행위 등이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이 셰드 워크에 해당한다. 학교교육이란 자격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산업이나 다름없다. 배우고 있는 동안은 전혀 무보수이며 학교만 나오면 모두 정당한 보수를 받는다는 기약도 없다. 다만 자격증·졸업증이라도 따놓지 않으면 보수를 청구할 자격도 없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다닐 뿐이다.
이리하여 필연적으로 셰도 워크를 하게되는 학생들이 늘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졸업한 다음에 정당한 제몫을 받고 관청·기업 등에서 엘리트가 되는 우량품은 극소수 일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이런 우량품, 곧 전문가 엘리트를 만들어내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들러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량엘리트의 존재가치는 높아진다.
이렇게 보면 대학이라는 이름의 교육공장은 그것이 생산해내는 젊은이들에게 과대망상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다시 없는 범죄자가 된다.

<대학생 프로선수>
셰드워커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회내의 불만에너지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룸펜 집단으로부터 출발한 나치스는 하급공무원·교사, 또는 고급실업자 등의 셰도 워커들을 흡수함으로써 정권획득의 발판을 굳힐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네 대학들은 재무구조가 엉망인 부실기업과 같다. 그들은 내일 갚아야할 은행 빚 생각은 않고, 시장구조도 살피지 않으며 마구 상품들을 양산해 나가며 있다. 불량 건재로 지은 짐은 모진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런 속에서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꿈을 꾸게되지도 않는다.
그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옳을 것인가. 여기서 생각은 다시 대학생 프로축구선수들로 돌아가게 된다.
여러햇동안 동창회가 끈질기게 엄청난 압력을 가했어도 시카고대학은 미식 축구팀을 만들지 않았다. 축구가 대학의 아카데미즘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시카고대학은 인기대신에 권위를 택한 것이다.
대학의 권위는 남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학은 프로선수를 키우자고 있는게 아니다. 또 운동선수의 인기에 매어 달려 있어야할 정도로, 대단찮은 정도의 대학이라면 이미 그것은 교육의 전당은 아니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뛰어난 운동선수라 하더라도 대학을 다니는 한 어디까지나 학생이며 학생을 다스리는 학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대학이 재학생의 푸로경기 참가를 묵인할 수밖에 없을 만큼 권위가 없다면 이미 대학으로서의 존재 이유는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운동선수쪽에서 봐도 그렇다. 학사증이란 우리나라에서는 되도록 셰도 워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여하는 자격증일 뿐이다. 이미 학사증 이상의 자격을 지니고 있는 프로급 운동선수들이 굳이 모교를 망신시켜가면서까지 끝내 학사증을 받겠다고 해야할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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