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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4년전의 여름은 몹시도 더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무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너무나 절박하고 기막힌 상황이 기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켰던 까닭인가.
아흔이 다되신 시할머님께서는 안면피부암으로 누워 계셨는데, 그러나 나는 넷째 딸인 막내를 병원의 수술실에 넣어야만 하게 되었다. 겨우 6살인 막내가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중에 천장에 달려 있던 철제 선풍기가 떨어지면서 옆구리를 친 것이다. 심한 충격으로 신장은 견디지 못해 터져 버려 소변을 볼때마다 피를 한 대야씩 쏟아놓았다.
첫 번째의 수술은 흩어진 신장 조각을 주워 모아 이리저리 맞춰 동글게 얽어매는 일과, 소변을 옆구리로 빼는 수술이었다. 수술이 성공했을 때의 기쁨은 너무 너무 커서 소변을 어디로 보느냐는 문제도 될 수 없었다. 수술을 받고 나온 조그마한 딸 아이의 몸에는 생명줄이 너무 많아서 업을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코에는 산소 호흡기의 줄과 가래를 받아내는 줄이요, 손과 발목에는 링게르 주사줄, 옆구리에는 소변 배설줄이 있었으니 옷도 입히지 못하고 타월로 배만 덮어줄 수 밖에 없었다.
한 달만에 신장은 겨우 소생하여 제기능을 할수 있게 되었다. 말이 쉬워 한달이지 그때의 한달은 나를 폭싹 늙게 만들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두 번 째의 수술허락서에 사인을 하라고 하셨다. 옆구리로 돌려 뺐던 요관을 방광으로 연결해야만 밑으로 소변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의 수술로 배에는 보기 싫은 흉터가 30cm나 있는데, 그 옆자리를 다시 가른다니 어린것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아서 사인하는 나의 손은 무거웠다. 철없는 막내는 옆구리에 찬 기저귀가 부끄럽다고 빨리 수술을 해달라고 하며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손을 흔들면서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실의 그 길고 긴 복도를 소리도 없이 침대를 밀고간 흰가운의 사람들은 다시는 나에게 막내를 둘려 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나무의자에 머리를 짓 찧으며 죄인처럼 소리를 죽여 울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회복실의 문은 굳게 닫혀진 채 열릴 가망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침대 하나가 끌려 나오면 나는 미친 여자처럼 뛰어갔으나 내 아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수술도중에 체력이 약해서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는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아 비통한 심정에 가슴의 피가 말랐다. 나는 기다림에 너무 지쳐 이제는 속지 않겠다고 침대가 나와도 보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까운 마음속의 거짓 행동일 뿐, 열이면 열번, 백이면 백번이라도 뛰어갈 자세가 되어있었다.
끊어질듯 팽팽한 긴장으로 허탈해진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조차 잊어가고 있을 때 회복실에서 나온 침대는 둥근 비닐막이 비닐하우스의 형태로 환자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 그 속에서 나의 딸이 꿈속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준요야, 준요야. 엄마다. 엄마.』
비닐막 속은 가습기에서 나온 수증기로 꽉 차 막내는 산타할아버지 처럼 하얀머리와 흰 눈썹을 하고있었다. 내가 콧물 눈물 범벅으로 너무 기뻐서 날뛰자 막내는 이 바보같은 엄마가 비닐막이라도 걷어 칠까봐 걱정을 하였다.
『엄마, 이거 벗기면 안돼』입원한지 47일만에 말라 비뚤어진 막내딸을 공주인양 소중하게 모셔 안고 집의 마루에 올라섰을 때, 나는 무엇인가 심하게 썩는 냄새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시할머님의 방을 들여다 보고서야 시어머님께서 뒤로 감추신 핀세트가 무슨 작업을 하시던 것인지도 알았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시할머님의 왼쪽 이맛살과 귀가 완전히 썩어서 떨어져 나가고 허옇게 골이 보이는 곳에 구더기가 곰실곰실 파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머리맡의 깡통에는 시어머님께서 핀세트로 방금 잡아내신 구더기가 피를 벌겋게 묻힌 채 우굴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슨 시어머님의 죄인양 아무리 소독을 해도 날씨가 너무 더워서 벌레를 막을 수가 없으셨다며 고개를 떨구셨다.
이런 효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나는 시어머님의 발등에 엎드려 울고 싶었다. 세상에 못나디 못난 나는 내자식 살리는 데만 급급해서 두 달이 어렵다던 의사의 말씀을 거의 잊고 있었다.『에미야. 이 쓰레기 같은 인간, 얼른 죽게 수면제 좀 많이 다고. 그깐 세 낱 먹고 어디 죽겠나. 많이 먹으면 정말 죽나? 황천가는 길은 어둡다던데 어메야, 골이 빠개지네.』
극심한 고통에는 약도 효험이 없는지 온밤을 하얗게 밝히시며 뒹구실 때는 안락사의 필요성 여부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하였다.
아래층에는 며칠이면 목숨이 다하실 시할머님, 2층의 내방에는 겨우 살아난 갈잎 같은 막내를 눕혀놓고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는 나는 참으로 암담한 처지에서 누구에게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남편이 돌아온다는 하루전, 시할머님의 기미가 이상하다시며, 시어머님께서 작은 아드님을 찾으러간 사이 결국 나 혼자서 종신을 한 것이다. 시어머님과 시동생 부부가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종이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할머님을 깨끗한 이부자리로 옮겨 드렸다.
그리고 썩은 냄새에 전욧자리를 걷어냈을 때, 우리는 요 밑에 감추어 있었던 무수한 흰 알약을 발견하였다.
시어머님께서 주워 보시더니 수면제라고 하셨다. 시할머님께서는 고통스러우실때 마다 수면제를 달라고 하셨을 뿐 한 알도 잡수시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산채로 썩어가는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셨던 목숨에의 애착이 너무 처절하여 나는 말을 잊었다. 이어 그 어려운 수술을 받은 직후인데도 뒤집어 쓰고 있던 비닐을 걷을 까봐 걱정을 하던 어린것의 애절한 모습이 거기와 겹쳤다. 순간 내 가슴은 형용할 수 없이 엄숙해지고,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주부백일장서 장원한 강난경씨>

<"글쓰면서 시련극복…시어머님께 감사">
21일 상오 문에 진흥원강당에서 열린 한국여류문학인회(회장 강신재)주최 제17회 주부백일장에서 참가자 2백30여명중 영예의 장원은 산문부의 강난경씨 (42·서울 마포구 합정동) 에게 돌아갔다.『시할머님의 죽음과 막내딸의 투병을 대비, 생명에의 집착을 과장됨 없이 표현했다』는 심사평을 받은 그는 이모든 영광을 시어머님께 드리겠다며 눈시울을 적신다.「시어머님이 아니였으면 내가 그 시련을 어떻게 이겨 낼수 있었겠어요. 부상으로 받은 이 순금목걸이는 시어머님 몫입니다. 내일 귀국하는 남편께도 줄 깊은 선물이 될 것 같네요.』비록 지금 시할머님은 돌아가셨지만 4년전 사경을 헤매던 막내딸은 건강을 되찾았다는 그는 평소 글쓰는 일로써 살아가면서 겪는 시련을 극복한다고.
주부백일장 4번의 참석 끝에 받은 이번 수상에 대해 사실 강씨로서는 남다른 감회를 갖고있다.
『4년전 슬픔을 딛고 겨우 일어서려고 한 바로 올해 셋째 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았읍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슬픈 얘기는 쓰지 않을 겁니다.
어떤 슬픔도 기쁨으로 표현할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남편은 해외출장이 잦아 그때마다 밤에 즐겨 글을 쓴다는 그는 요즈음은 학생때부터 써온 글 1백여편을 모아 단행본으로 발간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40살에 뒤늦게 입학한 상명사대대학원 미술과를 올해 졸업한 강씨는 KAL기장인 부군 성길웅씨(45) 사이에 세딸을 두고있다. <노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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