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사용해도 변함없는 유학시절 중고타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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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영수 ◇약력▲34년 서울생▲57년 이대 약대졸▲62년 서독 뮌스터대서 이학박사▲현 한양대학교 가정대학장(식품영양학)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재산목록 제1호는 누가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는지도 모르겠지만 고물 타자기 한대다. 그 타자기는 지금으로부터 꼭 25년 전인 1958년, 처음 독일에 유학 갔을 때 구입한 중고 타자기다. 그 당시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독일에서 몇년간 공부할 동안에만 사용하다 버리고 갈 셈치고 휴대용도 아니고, 거창한 대형 타자기도 아닌, 그저 기숙사방에서 놓고 쓰기에 알맞은 중형의 것이었는데 「올림피아」라는 상호만은 잘 알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동안만 쓰다 미련 없이 버리고 가겠다고 일부러 싸구려 중고 타자기를 샀던 애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보고서·편지 등 온갖 서류작성에 애용했다.
타자기의 구조가 간단해서 별로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기계라면 금방 고장이 날까봐 아예 겁부터 나서 어딘가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수리공을 부르던 나는, 어느새 그 타자기만은 내 마음대로 매만질 수 있는 기술자로 승격했으며, 그 중고 타자기 또한 큰 고장 한번 난 일 없이 그저 몇 번 분해소제를 한 것 외에는 활자도 큼직하고 좋으며 지금까지도 아주 잘 쳐지는 좋은 타자기로 남아 있다.
나는 그 타자기를 나의 서재 한구석에 놓아두고 가끔 그 타자기에 엇갈린 나만이 아는 희비애락의 추억을 더듬어 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딴에는 열심히 밤잠을 설치면서 타자기로 리포트를 쳐서 써내면 호랑이 같이 무서운 나의 지도교수였던 고「카우프만」교수는 나의 좌절감과는 아랑곳없이 새빨갛게 정정표시를 해서 나를 실망시키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힘겨운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수십 차례나 일어났으나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야말로 금의환향을 하게된 것이 마치 그 타자기의 덕택인 것 같아 마냥 대견스럽고 흐뭇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타자기를 어루만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최근 아주 멋지고 탐나는 새로 나온 전동 타자기가 나를 유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좋은 타자기가 내 눈에 차지 않는 데에는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최신형 타자기가 탐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떤 물건이건 25년 이상 지난 것은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장삿속이나 재산목록에 등록되는 것이기 때문은 더 더욱 아니다.
다만 구태여 이유를 밝히자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독일의 그 검소하고 절약하고 물건을 아끼는 국민들과 몇 년을 함께 생활하면서 배운 그 귀한 알뜰함이 내게도 뿌리가 박힌 것이리라 여겨진다.
나는 내 자식을 위시해서 현대인들에게 물건에 대한 소중함이 무척 결여된 것을 가끔 느낀다. 이것도 흔히 이야기되는 세대 차에서 온 것은 아닌지. 물론 우리가 공부할 때처럼, 그리고 우리가 자랄 때처럼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생활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물건이 풍족하고 나날이 새 상품이 나오고 하니 여건이 허락하면 새것을 사서 쓰고 ,헌 것은 버림이 당연지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옛말을 거울삼아 우리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는 독일국민들처럼 물건을 아낄 줄 아는 민족이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고, 더 세계사에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도 단지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급급하여 조악한 상품을 만들기보다는 좀더 멀리 내다보고 저 앞의 커다란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라고 본다.
오늘도 나는 서재에 앉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고물 타자기를 바라보며 내 일생동안 소중히 애용한 타자기를 구입했던 독일유학생 시절의 보람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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