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연대엔 서로가 「없는 존재」로「실용」정착 후 대한 관에 신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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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 피랍기 승객들은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유명한 자국산 소흥주가 나온 것을 보고 이 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고 의아해 했을지 모른다. 수원의 삼성전자를 둘러보던 그들 중의 몇몇은 중공 내에서 많이 보던 흑백 텔리비전 수상기를 떠올리고 또 다른 감회에 젖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추석을 전후 해 열린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는 중공의 유명한 경덕진 자기그릇이 선을 보여 부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냉전관념 씻을 때>
이렇듯 한·중공 양국간에는 최근 수년동안 알게 모르게 상품이 드나들고 사람들이 내왕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이번 피랍기 승객중의 1인은 유창한 우리말과 글 솜씨를 과시하면서도 한국계가 아니라고 강변하다가 송환비행기를 타기 직전 한국계임을 시사했다.
이 한국계 승객이 짐짓 중국인으로 가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야말로 오늘의 한·중공간의 냉엄한 현실을 그 무엇보다 잘 설명해 주고있다.
쌍방은 서로의 실체에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서로를 「없는 존재」로 애써 감추어왔으며 서로의 실체를 설령 인정할 경우에라도 그것은 적성국의 범주를 넘지 않는 것이었다.
이같은 비현실적인 쌍방의 정책과 관념은 우리나 그들에게 다같이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6·25전쟁과 그이후의 냉전구조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제의 적들이 손을 맞잡고 내일의 우의를 기약하는 새로운 데탕트의 틀 속에서 언제까지나 서로의 실체자체를 부정하는 냉전관념이 유효할 수는 없었다.
이번 피랍기 처리과정에서 그것은 극적으로 드러났다.
한·중공 쌍방이 서로간에 두터웠던 껍질을 깨고 나오기까지에는 특히 중공이 한국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세력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국력이 신장됐기 때문이다.
중공은 65년 1월15일 고의숙씨 등 우리 어부4명을 15년만에 송환시켰을 만큼, 50, 60년대의 대한 관은 적대적이었다. 그 해 1월22일에는 당시 농림장관이던 차균희씨의 부친 영환옹(당시72세)을 포주에서 영주 귀국할 수 있게 한일도 있었지만 60년대까지도 중공에 나포된 어부들은 5, 6년간의 형기를 마쳐야만 송환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74년 11월1일 제177광명호가 억류 18일만에 풀려 나오는 것을 시발로 중공은 이 방면의 문제에서 조금씩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중공은 78년12월에는 한 재미교포에게 길림성 연길의 노모를 방문 할 수 있도록 1개월간의 체류비자를 허가함으로써 쌍방의 내왕이 가능하게끔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80연부터 내왕시작>
그 후 양국은 80년부터 3전7백만(한국)과 10억(중공) 인구에 비하면 그야말로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지만 80년부터 10명 안팎의 국적인을 상호 내왕하도록 했다. 그 중에는 쌍방의 재외교민, 국제기구직원, 상인, 관리 등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중공은 모택동 사망(76년)이후 등소평(당 부주석)의 실용노선이 정착되면서 대한관계에 다소신축성을 보여 양국 밖의 장소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나 국제체육행사에서 우리를 기피하지 않고 접촉하도록 하고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제3국에서 양국대표들은 공·사석에서 자연스럽게 접촉하며 중공대사들은 한국과의 수교가 바람직하나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등의 유연한 발언도 하고있다고 전했다.
중공은 자국의 경제개발정책을 입안하는데 한국의 개발경험모델을 참고로 하기 위해 78년 과학원 산하에 조선경제연구소를 발족해 운영할 정도다.
중공은 79년9월 상해에서 열리기로 된 세계청소년 축구대회 아시아 최종선발대회를 예선전 우승국인 한국팀에 대한 입국 비자발급을 거부해 유산시켰다.
그러나 중공은 최근 한·일·중공·북한 4개국의 체육대회를 열자는 일본 측의 제의에 찬성했고 그들이 주도하는 아시아 탁구연맹에 한국의 가입을 받아들일 태세인 것으로 알려져 조만간 체육분야에서는 양국 교류가 이루어질 전망이 짙다.
중공의 월간사진잡지 『중국화보』는 78년 2월 호에 지워 버릴 수도 있는 태극기 마크도 선명한 한국 배구 팀의 경기장면을 실어 관심을 끌었다. 중국 백과연감 80년 판에는 한국항목이 「남조선」으로 명기돼 국체 및 정체, 3부 요인과 개략적인 한국개장을 싣고있다.
또 제3국을 통한 간접 거래일 망정 79년부터는 양국무역도 시작됐다.
중공이 당시 민생의 편의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상호교역이 활발해 졌고 81년 광주의 남방일보는 양자간의 무역관계를 공식으로 보도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이같은 교역은 북한의 항의와 82년 가을 금일성의 북경방문 결과로 중공이 제3국을 통한 교역마저 못하도록 함으로써 최근에는 격감했다는게 업계의 얘기다.

<대륙붕 등 현안 많아>
양국간에는 우리측이 제의한 대륙붕 경계획정문제(73년), 어로약정체결문제(76년), 신안해저유물공동조사문제(77년)등이 우선적인 현안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금년 1월말에는 한·일,·중공간에 동경∼상해∼배경을 잇는 직항노선개설에 우리 비행정보구역 사용에 의견을 모아 관계개선에 일보의 전진을 기록했다.
이번 항공기납치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에 온 심도 중공 측 수석대표는 착한 때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왔다고 토로했다. 그의 말은 공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까운 양자가 오늘날 소원한 관계를 갖고있는데 대한 중공 측의 완곡한 모종 시사일 수도 있다.
한·중공, 그 가깝고도 먼 거리도 이번 여객기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보듯 국제적 대세와 양국의 입장에 따라 점차 좁혀져 나가는 방향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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