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판결된 내용 재심 허용 추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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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사법부 과거사 정리 위해"
한나라 "3심제 규정한 헌법 침해 소지"

사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 움직임과 관련, 여권 일각에서 대법원 등에 의해 최종 확정판결된 내용을 법원이 다시 심의하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의 재심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은영 제1정조위원장은 30일 "군사독재 시절 사법부의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재심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5월 통과돼 발효되고 있는 과거사법만으로는 과거의 판결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에 국가 공권력에 의한 범죄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특별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나 최종길 교수 사건 등이 특별법을 통해 새로운 판결을 기대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덧붙였다.

여권이 특별법 제정에 나선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범죄 피해자의 재심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발언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이 의원 등 열린우리당 법사위 소속 의원들은 전날 광주고등법원 국정감사에서도 유신과 5공 시절의 사법부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질의를 여러 차례 했다.

이런 움직임은 청와대와의 교감에 따른 것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사법개혁추진위원회와의 모임에서 재심 특별법 추진 필요성을 언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위헌과 사법부 독립성 훼손 등을 거론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나경원 공보담당 원내 부대표는 "특별법을 만들어 사법부의 과거사를 정리하겠다는 것은 삼심제를 규정한 헌법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 의원은 "재심을 해야 한다면 현행 법에 규정된 재심 사유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등 사법부 고유의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강재섭 원내대표는 "지금 와서 판결문을 뒤진다든지 재심 사유를 확대하는 특별법을 연구하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전진배 기자

법조계 "사법권 무력화 발상"
"법적 안정성 훼손 … 형평성에도 어긋나"

법조계는 재심특별법에 대해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현행 대법원 판례를 변경해 재심을 보다 넓게 허용해 주면 되는데 특별법을 제정할 경우 위헌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강훈 공동대표는 "재심특별법은 헌법의 근간인 3심제를 흔들 수 있고, 과거의 시국사건에만 재심 혜택을 줄 경우 다른 사건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준선 변호사도 "법원 판결의 확정성과 법적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며 "재심특별법은 사법권을 무력화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형사소송법(제420조)은 ▶기존 판결의 증거가 위조.변조되고▶수사.재판에 관여한 법관.검사 등이 직무상 죄를 범하고▶기존 판결보다 가벼운 죄를 인정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된 경우에만 재심을 허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재심 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실제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가 김대중 전 대통령(1980년 내란음모사건)과 함주명씨(83년 조작간첩 사건)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인혁당 사건(75년)은 재심 허용 여부를 놓고 재판이 진행 중이다.

김갑배 변호사는 "사법부가 억울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상당한 증거가치가 인정되면 재심 기회를 주도록 기존 판례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법무부는 이날 정부 과천청사에서 학계.법조계 등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정책위원회를 열고 위원회 차원에서 과거사 정리 문제를 다룰지 논의했다. 위원회는 "검찰 차원의 과거사 청산은 사법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많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할지를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기로 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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