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6> 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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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도영총장의 반혁명 사건으로 일단 5기생들이 물러나자 박의장과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당시 논란이 되어 오던 군정기간문제를 일단 매듭지었다.
소위 박의장의 「8·12」성명으로 「1963년 여름에는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것』이며 『구정치인중 부패부정한 정치인의 정계 진출을 방지할 입법 조치를 하겠다』는 민정이양계획이었다.
5·16을 기준으로 하면 2년이 조금넘는 기간중 군정을 실시하겠다는 의지였다.
5·16직후 초기에는 군정단기실시가 최고회의 분위기였다.
당시 장도영의장과 5기생들은 단기군정을 주장했고 군의 분위기도 군정은 곧 끝난다는 생각들이 주류를 이룬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김종필중앙정보부장, 이석제최고위원등 강경파는 장기군정을 주장했다.
김종필씨같은 사람은 『5·16의 목표가 민정의 안정기반을 만드는것인만큼 사회혼란의 요인이 되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수술을 위해서는 충분한 군정기간이 필요하다』면서 6년 군정을 주장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군정1년을 종용하고있던 때여서 객관적으로 군정을 장기화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최고회의안에서 단기주장파와 장기주장파의 타협끝에 2년안이 채택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향후 2년간의 군정을 어떤 계획에 의해 이끌어 갈 것인가의 과제를 맡은 사람은 지금까지 상황에서 보아왔듯이 당연히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 과제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신당창당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최고위원중에는 군복을 벗고 새로운 민정에 참여할 사람이 있을것이고 또 민정에서도 혁명과업을 계승해야 한다는 논리로 볼때 혁명주체들에 의한 새 정당의 필요성이 당연히 나온것이라 볼수 있다.
이 신당창당을 주도했던 기관이 바로 중앙정보부였다.
특히 신당사전조직의 핵심인물들이 8기출신의 중정간부들이었다.
8기출신으로 중정탄생의 산파역중 한사람인 석정선중령(당시 중정2국장)은「8·12성명」며칠뒤 당시 중정행정관인 강성원소령에게 『민정이양을 한뒤에도 박정희의장이 대통령과 같은 공직을 맡지 않고도 나라를 이끌어갈 방법이 있는가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며칠뒤의 연구결과는 『정권을 잡지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보고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특히 구정치인과 똑같은 시기에 당조직을 해서는 안되고 깨끗한 사람을 찾아내 사전에 조직을 해야한다는 보고였다.
그래서 1단계로 정당의 정강정책·이념등을 마련할 연구실등을 두기로 하고 중정부장 자문기관 성격의 「대외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연구위원은 고대의 윤천주교수, 서울대의 김성희교수, 중앙대의 강상운교수등을 비롯해 윤태림·김운태·정범모·박종화씨등과 김정겸·김학열·최규하씨등 관료출신등 21명이었다.
이 연구실은 약2개월 뒤인 10월중순께 새로 만들 겅당의 골격과 조직·원칙등을 상세하게 집대성해놓은. 소위「8·15계획서」를 만들어냈다.
이 계획서는 박의장의 서명까지 받아 사전 조직팀이 소중히 간직했으나 63년1월 창당직전 친김-반김파간의 내분때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 「8·15계획서」에 의한 조직작업을 총괄한 사람도 8기생으로 중정행정차장이었던 이영근씨였다.
당초 최고위원 길재호씨와 이석제씨가 조직책으로 복수추천됐으나 이영근차장이 겸임토록 했다는 것이다.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의 극비지시로 이영근중정차장이 책임을 맡아 포섭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62년 1월부터였다.
때묻지 않은 각계의 참신한 인물50명을 선정, 포섭공작을 벌여 조직을 끝낸것은 62년 봄이었다.
이 조직사업에는 최고위원뿐 아니라 조직에 가담한 당사자들조차도 조직의 내용을 모르는 점조직 방식이었다.
조직의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면서 이 모임은 「재건동지회」라는 중앙기구를 갖추었고 지방조직에 들어가 62년 10월께에는 지방조직이 끝났다.
1년여에 걸친 사전조직으로 막대한 자금이 들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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