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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view &] 대기업의 스타트업 M&A 밀어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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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표재용
산업부장

아마 처음 아닌가 싶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가 아닌 대기업 총수가 공개석상에서 재계의 판을 바꾸자고 제안한 것 말이다. 호루라기를 분 건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마련한 신년 기자 회견에서 그는 ‘주전 선수 교체론’을 피력했다. “20대 그룹 중에 절반은 (창업자가 이끄는) 자수성가 기업으로 채워져야 한다.” 오너 3세 경영인인 그가 이런 생각을 밝힌 건 이유가 있다. 그는 틈날때마다 “기업이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 ‘땅콩 회항’ 사건은 반기업 정서를 더 악화시켰다.

 대기업의 그늘은 다시 부각됐다. 사실 20대 그룹은 언제부턴가 회원제 모임처럼 돼버렸다. 뿌리가 공기업인 몇몇 회사를 빼면 오너 가족들만 입장이 가능하다. 대기업으로 성장하던 시절의 열정과 기업가 정신은 잊혀지고, 대대로 승계된 기업이란 이미지는 강해졌다. 박 회장의 바람대로 자수성가 기업인이 대거 수혈되면, 적어도 ‘대기업=가업 승계’란 부정적 인식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무기력증에 빠진 한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새로운 선수의 등장은 경기장 전체의 활력을 키운다. 미국엔 한국보다 훨씬 덩치 큰 기업이 많지만, 마크 저커버그 등 젊은 기업인들 덕에 역동성을 잃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한국보다 민간 기업 역사가 짧은 중국조차 하루가 멀다 하고 마윈(알리바바), 레이쥔(샤오미),마화텅(텐센트)같은 쟁쟁한 신진 기업인을 배출하고 있다. 문제는 국내에서도 이런 게 가능한 것이냐다. 유감스럽지만 답은 ‘글쎄올시다’이다. 가장 근접한 후보격인 중견기업조차 대기업 진입을 주저하는게 현실이어서다. 최근 4년간 중견기업에서 30대 그룹으로 진입한 기업이 단 한곳도 없다. 중소기업도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입장료가 터무니없이 비싸고 부담스러워서다. 덩치가 커지면 정부로부터 받는 각종 지원은 사라지는 반면 온갖 규제를 떠안아야 한다. 법이 그렇게 정했다.

 틀을 바꿔야 한다. 박 회장도 해법을 제시했다. “진입 규제를 과감히 풀고, 자수성가형 기업에 파격적 지원을 하라.” 그러나 이 정도만으론 부족하다. 10년, 20년 만에 나올까말까한 ‘천재형 선수’ 한 두 명을 발굴하는 게 아니어서다. 차세대 유망주들이 대거 탄생할 수 있게 저변을 넓히려면 더 파격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미국 실리콘 밸리처럼 ‘성공 스토리’가 쏟아져 나오도록 말이다.

 변변한 벤처 지원책 하나 없이도 실리콘밸리엔 세계 최고의 인재와 돈이 계속 몰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업간 인수·합병(M&A)이 비밀이다. 세계 최대의 정보기술(IT)기업인 구글도 최근 2년 새 160건에 가까운 M&A에 나섰지만 여전히 배고파 한다. 기업을 산 쪽은 혁신 DNA를 수혈하고, 판 쪽은 더 큰 야망을 품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우리도 이게 필요하다. 대기업이 눈치 안보고 유망 국내 스타트업(신생기업)과 벤처 인수에 나설 수 있게 정책의 방향을 트는 일이다.

 우선 정부가 나서 분위기부터 바꿔줘야 한다. 대기업의 스타트업 M&A를 경제력 집중, 문어발 확장, 중소기업 시장 침범 식으로 보는 과거의 시각이 바뀌도록 말이다. 요즘 국내 스타트업은 아이디어와 혁신 기술이 핵심 자산이다. 이전처럼 땅과 건물을 사거나 작은 시장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덩치는 작아도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하이테크 회사를 잘만 고르면 투자처를 못찾아 고민하는 대기업도 새로운 돌파구를 열 수 있다. 스타트업은 성과를 내기도 전에 돈과 노하우가 부족해 중도에 주저앉은 이른바 ‘데스밸리’ 리스크도 줄일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는 대기업엔 세제 혜택 같은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요즘 벤처 업계에 중국 자본이 몰려들면서 스타트업의 중국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거래인 M&A를 활성화하는 게 지역별로 대기업들에게 당번(멘토)을 떠맡겨 신생기업의 뒤를 봐주는 ‘창조경제혁신센터’나, 팔비틀기 식으로 투자를 독촉하는 규제(기업소득환류세제)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스타트업 인수 활성화는 기업가 정신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 스타트업엔 대기업이 잃어버린 활력과 도전정신이 넘치기 때문이다. 상생, 윈윈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닌가.

표재용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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