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되는 교육정책자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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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학입학학력고사에서 1백점은 사실상 0점에 해당한다. 3백40점 만점에서 체력장점수 20점을 빼면 학력고사 자체만으로는 80점을 얻은 것으로, 그 80점은 3백20점의 정확한 4분의1. 4지 선다형 시험에서 ㉮또는 ㉯·㉰·㉱ 중 한 곳에만 생각 않고 체크해서 얻을 수 있는 점수이기 때문이다.
그 이하의 점수를 얻기란 오히려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사실상의 0점자가 서울에서는 1만명 가운데 74명이나, 경북에서는 2백44명 꼴로 나왔다. 서울에 비해 경북은 무려 3.3배. 고득 점자는 그 반대로 나타났다.
이처럼 지역간 고교생의 학력격차는 예상보다 훨씬 큰 것으로 드러났다. 전국 1천3백77개 고교(83년 졸업생이 있는 학교)가 평준화돼 있다는 가정 위에 운영되는 현행 입시 등 제도전반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학교간에는 더 큰 폭의 격차가 드러나 입시 때면 논란의 대상이 돼 왔지만 13개 시-도간의 이같은 격차는 현행제도가 허구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의 반증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본사가 지난해에 이어 83학년도 대학입학학력고사 응시자 64만7천9백71명 전원의 성적표를 수록한 컴퓨터 테이프를 단독입수, 분석·보도(2일자 l, 3면)한 것도 우리의 고교교육에 내재하는 이 허구를 밝혀 내고 그 타개책을 모색하자는 뜻이었다. 지금 잘하고 못한 시-도를 드러내 일시적인 흥미의 대상으로 삼자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문교부는 그동안 시-도간 격차가 당장 드러나고 교육제도의 존립기반이 되고 있는 고교평준화에 비판이 미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같은 귀중한 정책자료를 사장시켜 왔다. 지난 입시 때 전형자료로 대학에 이 테이프를 내놓으면서『공개하면 어떤 처벌도 받는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입시가 끝나자 즉각 회수하는 등 철저한 보안을 해 왔다.
그렇다고 그동안 이같은 자료를 고교교육내실화를 위한 정책에 은밀히 활용한 것도 아니었다.
중앙일보는 지난 입시 중 이 자료를 입수, 즉각 공개할 것도 검토했으나 자칫 입시열풍에 휘말려 부작용을 빚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공개시기를 5월초로 늦춘 것이다.
문교부는 지금부터라도 기왕에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뒤쳐진 시·도 고교생의 학력을 끌어올릴 다각적인 처방을 공개적으로 마련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 같다. 덮어두고 편안하게 지내겠다는 편의주의 행정은 피교육자에게 죄악을 저지르는 일일뿐 아니라 더 이상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권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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