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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과 내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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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족청 거세가, 이대통령이 족청을 두려워한 소치가 아니듯이 이기붕도 족청거세에 앞장선것은 아니다. 족청과 비족청계가 자유당안에서 벌인 권력투쟁은 원내와 원외의 투쟁이었다. 신두영씨는 『가령예를 들어 뒷날 이기붕씨와 대립하는 조경규(국회부의장)도 족청과 맞섰다. 그랬지만 조경규는 원내 자유당그룹의 리더로서 원외인 족청세력과 대립했을 뿐이다. 그는 원래 성품이 온건한 사람이어서 개인적으로 족청과 맞싸울 이유도 없었고 모사도 아니었으나 당시의 세력판도에서 원내 원외가 대립했기때문에 족청공격에 나선것이다. 오히려 조경규보다는 대통령 비서를 지낸 김종협의원이 족청과의 싸움에서 액터역할을 했다』고 했다.

<이기붕, 2인자로>
사실 족청이 거세된후 자유당의주도권은 이갑성·배은희등이 행사했고 이기붕은 그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역시 주류파의 한 세력권을 형성했다.
그것이 이기붕중심으로 된것은 3대국회구성과 때를 같이해서였다.
3대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원내 과반수라는 절대안정세력을 형성해 원내 중심의 정담이 되었다. 그런데 이갑성·배은희 두사람은 모두 이 선거에서 낙선한것이다.
즉 자유당 3인의 실력자중 2인이 원내진출을 못하게되니 자연히3인중의 1인이 리더의 자리를 굳힌것. 그것이 이기붕이 자유당의 2인자로된 배경이다. 그때 자유당은 원내안정세력을 확보했고 내부투쟁도 극복한 여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렇지만 자유당은 집권당은 아니었고 이기붕은 자유당의 2인자였을뿐 이승만정권의 2인자는 아니었다.
신두영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박사는 국내정치세력은 경계하지 않았고 외국에 있는 한국사람, 즉 외세를 불러들이는 세력을 몹시 경계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모두 자기를 밀어주고 협력해줘야하는데도 힘을 합쳐 자기를 밀어주지 못하고 왜 서로 싸우느냐고 불만이 많았다.
이박사는 국내 야당세력을 응징하려 했으나 결코 말살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박사가 경계한것이 국내정치세력이 아니고 미국, 일본, 공산당같은 외세였기 때문이었다. 또 이박사는 야당까지도 자기조직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이박사가 미워한것은 야당이 아니라 야당에 속해있는 자연인 「누구」를 미워한것이다.』
이박사가 정파를 보는 눈이 이랬듯이 자유당도 집권당으로서 대우하지는 않았다.
자유당이 집권당이 아니었다는것은 내각과 자유당과의 관계에서 엿볼수 있다. 백두진총리가 실각하고 뒤를 이은것이 변영태총리다. 54년이래 총리제가 없어질때까지 총리를 맡은 변내각은 자유당과는 소원했다. 장관인사 역시 자유당과는 무관했다. 이는 인사와 국무회의운영의 내용을 가장 긴기간 지켜본 신두영씨의 회고가 말해주고 있다. 『변총리내각은 국회·여당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이박사, 외세경계>
변총리는 총리로 임명되기전에는 이기붕과 거의 만나지 않았고 총리로 임명된후 가끔 만날 정도였다. 자유당의 다른 당무위원들과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이박사는 자유당이 내각에 간섭하는것을 반대했다.
변총리는 정치색이 거의 없었기때문에 이박사의 신임을 얻었다.
변총리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의 일이다. 정초에는 여야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이박사를 찾아와 인사를 드렸는데 재미있는것은 이박사와 가까운 사람들이 앞줄에 서고 이박사와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이 스스로 뒤에 가서 섰다.
변영태씨는 자신이 앞줄에 서고 이범석씨등이 뒷줄에 서있자 이범석씨를 앞줄에 서게하고 자신은 맨뒷줄에 가서 섰다. 이범석씨에게 양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박사는 그러나 앞줄에 서있던 사람과는 아무도 악수를 하지않고 뒷줄에 서있는 변영태씨에게 다가와 <요즘 좋은 책 썼다며>하고 악수를 나눴다.
이박사는 정초 인사때 악수를하는것조차 신경을 써야했다.
이박사는 그 자리에서 이범석씨와 악수를 나누면 다음날부터 족청계가 머리를 흔들고 다니리라는 계산에서 함부로 악수를 나누지 않았는데 변형태씨는 정치색이 없는 인물이라 스스럼없이 악수를 했던것이다.
이범석씨 뿐만아니라 누구와도 악수를 함부로 할수없었던데에 이박사의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다.』

<악수하면 기세올라>
신두영씨는 50년대의 정치를 이해하는데는 그때의 사정이 고려되어야한다고 했다. 그는 예를 들어 예산은 외국원조에 의해 대충자금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56년까지도 국가예산은 미국제너럴 일렉트릭사의 실험실 예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며 그런 사례로서 두개의 일화를 얘기했다.
『자유당정권때 정부기구 간소화문제가 가끔 나왔지만 그것은 기능개편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단지예산상의 이유였다. 특히 경찰을 줄이자는 얘기가 가끔 나왔으나 경찰예산을 깎자는 얘기가 나오기만하면 경찰에서는 북악산까지 침투한 간첩을 체포해서 예산회의에 나와<실정이 이러하니 예산을 줄이기는 어렵다>고 항변했다.
이러한 방식은 장경근이 자주 사용했지만 북악산에서 간첩이 나온다는데야 의원들은 할말이 없었다.
또 자유당은 장관임명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공무원사회에서는 자유당을 경원했다.
자유당이 공천한 장관으로 자타가 인정한 사람에 정재설농림장관이 있었다.
정농림은 자유당 시당위원장을 하다가 농림장관이 됐기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당에서 공천한 장관처럼 보였다. 정농림은 장관이 된후 내무부의 협조를 얻어 정부양곡조사를했는데 4만섬이 모자랐다. 이를 계기로 야당에서는 정부공격에 나섰고 자유당까지도 이에 합세해 그책임이 정농림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장관을 그만두라고했다.
정농림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꼼짝없이 공격을 당해야할 입장이었다.이를 보더라도 우농림은 이박사와의 개인적인관계에서 장관에 기용된것이지 자유당의 공천에의해 장관이 된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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