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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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구시북구산격동은 달성서씨판도공파의 마음의 고향이다. 대구시내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3km쫌 가면 예부터우청룡 좌백호의 명당으로 알려진 당산과 산밑 평화스러운 마을을 만난다.
해방당시만 해도 이곳엔 서씨만 3백여호쯤 살았으나 20여년전 도청·도교위·경북대등이 들어서면서 급속히 도시화해 현재는 1만5천여가구4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래도 산격1동913 종실일대엔 아직도 서씨집이 2백여가구 몰려있어 여전히 서씨마을로 통하고있다.
서씨집안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된것은 세종조때. 당시 시조 서진이래 서씨집안은 현재의 달성공원터에 살고 있었다. 구릉이 낮고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세종이 왜구침입의 방벽으로 삼겠다며 이곳 집터를 희사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삼남균전제처사로 있던 귀계 서항이 『국가의 일』이라며 흔쾌히 헌납했고 이에 감읍한 세종이 대신 대구시내(당시달구벌) 남산 옛 역터의 기름진땅을 주겠다고 했으나 서항은 이를 사양하고 『달구벌내 백성에 대한 세금을 감해달라』며 현재의 산격으로 옮겨왔다는것.
이때 감면된 세율은 한일합방때까지 지켜져 대대로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현재 달성공원에는 이를 기념하는 유허비가 서있으며 대구유림들이 건립한 귀암서원이 대구시내 중심가인 동산동에 위치해있다.
산격동 서씨들은 이때부터 서항의뜻을 받들어 재물을 탐내지 않는다는 「서무탁」을 가훈으로 삼아왔다.
지금도 종실에는 나이 많은 집안 어른들이 모여 시조를 읊고 서예를 즐기고있으며 『결혼·제사등집안 대소사에는 온동네가 다모여 떠들썩할정도로 도심중의 씨족마을을 유지하고있다』고 판도공파 종친회 이사장 서진하씨(76)는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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