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83>제79화 육사졸업생들(136)거사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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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0년11윌 박정희 소장 자택에서의 모임인「신당동밀회」이후 8기 핵심멤버에 의해「혁명동지」로 포섭된 8기생들은 20명 가까이됐다.
6관구(서울)작전참모이던 박원빈중령 (61·함북청진·훈장예편·전무임소장관) 오학진중령 (55·평남평원 준장예편 6, 7, 8, 9대의원) 1군사령부의 조창대중령(준장예편·작고) 심흡섭중령 (준장예편·전재건국민운동본부차장) 엄병길중령 (준장예편) 과 홍종철 (작고·전문공장관) 장동운 (56·황해 준장예편 공화당사무차장·주공총재역임) 최홍순(준장예편·前조폐공사사장) 서상린(58·경기안성·준장예편 6, 7, 8, 9, 10대의원) 임광섭 (준장예편·전해운공사사장) 이지찬 (대령예편·전전매청장) 안태갑 (준장예편·전감사위원) 김용건 (준장예편 ·전농협이사) 김성용 (준장예편·전총무처소청위원) 박배근 (준장예편·전감사위원) 김재후 (전내각사무처인사국장) 씨등이 그들이다.
한편 박치옥 대령을 중심으로 하는 5기생 그룹과 강상욱씨 (56·원남원산·6, 9대의원·청와대대변인 역임) 중심의 9기생 그룹도 8기생들과는 별도로 밀회를 거듭하면서 거사계획을 추진해나가고 있었다.
박치옥 대령은 8기생중심의 정군·항명파동에 그들을 자택으로 불러『군인들이 말과 글로써 큰 일을 하겠다는 것안가. 너무 순진한 착상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힘으로 결판을 내야한다』고 소신을 피력하여 후에 이들이 쿠데타모의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말도 있다.
또 해병대와 공수단도 별도의 움직임이 있었다고도 하고 이범석씨가 조직했던 족청출신 장교들과 서북청년단출신 장교들도 각각 일을 꾸민다는 소문도 들렸다.
강상욱씨한테 후에 들은 얘기지만 9기생들은 서울시내 몇개 토목공사를 위해 남산에 주둔 중이던 4개 공병대를 주축으로 거사를 해 보려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당시 박정희 육본작전참모부장 보좌관을 지내 자연히 박소장의 움직임을 알았고 박소장이 9기의 모임을 8기와 합치도록 권유함으로써 9기도 정식으로 혁명세력으로 포섭했다. 이처럼 8기와 9기가 합침으로써 쿠데타의 중앙조직은 확고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보안상 이유로 박정희 소장을「사장」으로 불렀고 8기 연락책은 오치성대령 (오씨는 61년초에 대령으로 승진했다) . 9기생 연락책은 강씨가 맡아 모의를 추진했다.
61년3월 충무장에서「8·9기연석회의」를 갖고 혁명참여세력의 중추를 8기와 9기로 형성키로 했다. 그리고 이미 포섭돼있는 동지라 하더라도 유아독존적인 성격의 몇몇 고참대령은 제외키로 했다.
그러나 조직결성 과정에서 8기와 9기간의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8·9기 합동회의」에는 8기가 선배이니만큼 각부서의 정책임자를 8기생으로 하고 9기를 부책임자로 하기로 했으나 그나마 부서 배치 과정에서 18명의 9기생들은 개별활동을 하도록 밀리고 강씨를 포함해 5명만이 부서를 맡게 됐다는 것이다.
3월초 11인 핵심 멤버는 서울 종로4가 어느 무허가 음식점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혁명조직 원칙을 결정했다.
즉 포섭대상자 선정 핵심멤버가 개별적으로 포섭하되 11인 연석회의의 심사를 거칠것과 포섭된 사람에게는 계획의 전모나 횡적 조직은 알리지 않고 종적인 조직체제만 알리도록 하는 철저한 점조직 수법을 쓰기로 했다.
3월10일 핵심그룹이 당시 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맡았던 박소장을 찾아가 최종 거사일정을 확정했다.
즉 거사는 4·19혁명 1주년인 4윌19일에 하기로 하고 그것이 안될 경우 늦어도 5월 중순 이전에 하기로 했다.
군부대 동원등 작전계획수립은 6관구 사령부의 박원빈중령과 옥창호중령이 받기로 하고 김종필씨는 각 조직간의 연락을 맡기로 했다.
그러면서 핵심 8기생 각자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가 주어졌다. 즉 ▲조창대중령(작고)은 1군공작을 맡고 ▲오학진중령은 33사단을 책임지고▲오치성대령과 김형욱중령은 공수단을▲박정희소장은 해군·공군·해병대와 2군을 맡아 동원하거나 거사를 지지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려나 이런 준비과정에서 철저한 점조직방식을 택함으로써 참여자 가운데는 거사의 규모와 방향등을 몰라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30사단의 경우 그 전모에 대한 불신과 회의 때문에 거사전날인 5월15일 모의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는 이탈사고가 생겼다.
7기의 박상훈 대령과 이갑영 대령은 30사단을 동원키로 했었으나 연락을 맡았던 이백일 중령이 혁명군간부와의 접촉을 안 시켜주고 전체적인 규모도 알려주지 않은데 불만, 사단장인 이상국 준장에게 출동계획을 알리는 바람에 5·16이 실패로 돌아갈 뻔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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