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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5)8기의 입교-제79화 육사졸업생들(12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육사 8기는 48년12월7일에 입교했다. 해방에 따르는 혼란은 어느 정도 수습돼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수립된지도 4개월이 채안돼 아직도 나라의 체제가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해 9월3일에 일어난 제주도 폭동은 아직 진압되지 않았고 10월엔 여순반란, 11월엔 대구의 6연대 폭동등 소요사건이 잇딸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군사력증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군간부의 대폭증원을 위해 모집한 것이 육사 8기다.
육사 8기에는 7기와 마찬가지로 특별반이 있다. 과거의 군사경력자들을 뽑아 3주일 정도의 훈련을 시켜 대위 등으로 임관한 기생들이다.
이들을「8기 특별반」-약칭「8특」이라고 하는데 8특에는 4반까지 있고 반마다 입교와 졸업일자가 달랐다.
정규 8기는 경쟁률이 10대1정도가 될만큼 지원자가 많았다.
그렇게 지원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 징집령이 곧 실시된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기왕 군북무를 할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장교로 임관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또 정부수립후 좌익의 합법적 투쟁이 불가능하게 되자 한때 본의 아니게 좌익단체서 활동하던 청년들의 입장이 난처해졌었는데 그런 쪽에서도 상당수가 지원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월남한 청년들의 동태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서북청년회·대동강동지회등 월남청년단체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상당수 8기에 지원했던 것이다.
합격자는 9백48명 이었으나 실제 입교날은 추가입교자를 포함해 1천명 이상이 입교했고 입교식 후에도 수차례 추가입교가 있어 정확한 입교자숫자는 파악이 안되고 있다. 그러나 숫적으로 최다 임관, 최다 장성을 기록한 최대의 기임은 분명하다.
8기생은 입교생이 워낙 많아 2개 대대로 나뉘어 교육했는데 제1대대에 1·2·3중대, 2대대에 5·6·7중대등 각3개중대로 편성되었다.
워낙 입교생이 많아 현재의 육사캠퍼스에는 다 수용을 못해 1대대만 육사캠퍼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2대대는 과거7기 후반이 교육받은 서울대공대 캠퍼스에서 따로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1대대와 2대대간에는 얼굴도 모르고 임관한 셈이 됐다.
당시 대대분류기준은 없었으나 1대대는 비교적 연령이 낮은 층으로, 2대대는 연령이 높은 층으로 편성했다. 특히 1대대 3중대는 사병출신들로 구성됐다』
8기생이 입교한지 70여 일이 지난 뒤 「사범출신 제9기 사관후보생」채용공고가 있었고 각지구별로 중졸 이상의 학력을 갖춘 사병 2백28명을 선발해 2대대 9중대로 배속했다. 또 추가로 38명의 민간인출신 후보생이 뒤늦게 입교해 이들과 같은 중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당초 육본계획에 의하면 9기로 임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역 사범출신으로 신병기초 훈련이 생략된 것만을 제외하고는 교육과정이 8기생과 같았다는 점, 교육훈련을 이수했다는 점, 당시 초급장교가 부족했던 상황 등이 고려되어 이들도 8기생과 같이 임관되었다.
사실 9기는 그후에 별도로 모집했다.
8기가 입교할 당시의 교장은 최덕신 대령이었으나 49년1월15일 김홍일장군과 교체되었다. 부교장은 유재전대령(전국방장관). 1대대장에는 김종갑중령(중장예편·국회국방위원장), 2대대장에는 박병권중령(중장예편·전국방장관)이었으며 중대장·구대장급에 현국회의장인 정내혁대위(중장예편) 손희선대위(중장예편)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면 8기생들이 어떻게 5·16주체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구성이 타기와는 좀 다른 점도 그 원인을 됐을 것이라고 본다.
첫째 타기에 비해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는 점이다. 숫자가 많은 만큼 우수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각 부대에 8기생이 안 끼여 있는 곳이 없을 정도여서 서로 연결해 일을 벌이기가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는 연령층이 비슷하고 사회교육배경도 비슷한데다 교육기간이 6개월로 비교적 길어 동기생 사이의 유대가 타기에 비해 뛰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들을 단결시키는 가장 큰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군의 정체현상에 대한 8기들의 입장을 생각할 수가 있다.
8기가 영관이 됐을 때는 군의 팽창이 정지되고 따라서 진급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군의 상층부는 30∼40대의 청장년층 이어서 8기들이 보기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군에서의 자신들의 발전은 비관적인 것으로 판단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러나 8기생 중에는 5·16에 가담하지 않은 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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