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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솔라리아와 강철 동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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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 공상과학 소설가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 세계에는 상반된 두 사회가 등장한다. 소설 '벌거벗은 태양'에서 주인공(수사관)은 '솔라리아'라는 미래의 식민지 행성에 파견된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아주 흥미로운 사회를 목격한다. 사람들은 단독주택에 살면서 집집마다 설치된 화상전화로 집 밖의 세상과 교신한다. 친구와 동료, 외부인 등을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동등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의 다른 소설 '강철도시'에는 솔라리아와 정반대의 사회가 나온다. 역시 수사관인 주인공은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지구 지하세계에 들어간다. 그곳 사람들은 강철로 만든 동굴에서 자기들끼리만 끈끈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좀처럼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낯선 사람을 배척한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솔라리아나 강철 동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둘의 중간 어디쯤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가 창간 40주년을 맞아 분석한 한국 파워 엘리트 사회의 구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학연.혈연.지연 등 사회 연결망을 분석한 결과 솔라리아 같은 개방형도, 강철 동굴 같은 폐쇄형도 아닌 것으로 나왔다. 다만 강한 집중형이 분화.해체되는 추세는 뚜렷하게 확인됐다.

1970년대 유신정권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이른바 긴급조치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엘리트 사회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경기고.서울고 등 몇몇 학교 출신자들이 강철 동굴처럼 강력하고 끈끈한 학연으로 한데 뭉쳐 있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는 강한 학연에서 일부가 빠져나와 '단독주택'을 짓고 외부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후 포스트386세대는 상당수가 동굴을 포기하고 나와 흩어져 사는 모습을 한다.

분화.해체 경향은 여러 분석 자료로도 뒷받침된다. 80년대 들어서만 엘리트 배출 면에서 50위 안에 들던 고교 가운데 60%가 바뀔 만큼 학연사회는 요동쳤다. 대학사회에서 여전히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졸업자의 힘이 셌지만 세대가 젊어질수록 다른 대학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여성 비율도 지난 40년 사이에 네 배로 커졌다. 대도시 인구가 불어났음에도 지방 중소도시와 농촌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영.호남의 지역 격차도 크게 좁혀졌다. 좋은 학벌.가문이 직업을 얻는 순간까지는 도움을 주지만 이후 조직에서 성공하거나 개인적으로 출세하는 데는 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분석 결과도 나왔다.

엘리트는 어느 시절, 어느 사회나 있게 마련이다. 학연.지연.혈연 같은 연줄도 마찬가지다. 정보화사회의 진전은 연줄 수와 연결 속도를 더 많고 빠르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은 연줄의 유무나 수가 아니라 그 구조다. 엘리트 연줄망의 구조가 강철 동굴처럼 폐쇄적이어서 자기들끼리만 뭉쳐 외부인의 진입을 막는다면 그 수가 적더라도 문제가 된다. 하지만 구조가 개방적이고 다원적이어서 엘리트의 충원 통로가 다양하게 열려 있다면 사방으로 퍼져 있는 연줄망은 변화와 발전의 동력원이 될 것이다. 다행히 최근 수십 년간 이 땅에서 만들어진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의 에너지는 사회의 좌표를 강철 동굴 쪽에서 솔라리아 쪽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그 이동 폭이 만족스러울 정도인지의 판단은 차치하고 말이다.

한국은 엘리트나 연줄에 대한 거부감이 유난히 강한 사회다. 좁은 땅덩이에서 많은 사람이 살면서 생긴 경쟁의식이 두 단어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 놓은 탓일까. 아니면 눌리고 갇히고 힘들었던 시절의 기억이 제도와 문화, 그리고 유전자 속에 내장돼 있기 때문일까. "연줄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말에 너무나 쉽게 동의하고 낙담하며 좌절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연줄사회라는 말에 지레 가위 눌려 행동해 보기도 전에 좌절할 정도로 우리의 엘리트 충원 구조가 폐쇄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본지의 파워 엘리트 분석 결과는 보여 준다.

이규연 탐사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