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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71》|제79화 육사졸업생들<124>부대월북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김창휘소령의 주도아래 숙군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49년5월 초순 2개대대의 부대 월북사건이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김형일 중령이 맡고 있던 춘천의 제8연대 예하 1대대와 2대대였다.
49년5월3일 저녁 홍천에 본부를두고 있던 제2대대에는 대대장 강태무소령 (2기·경남동성·당시26세)의안내로 민간인 신사 한명이 나타났다.
강소령은 국방부에서 나온 정보요원이라고 소개했다.
강소령은 5월4일 점심을 마치고 3개중대를 소집, 상부의 명령에 따라 출동한다면서 현리로 이끌고 가서 숙영준비를 서둘렀다.
다음날 새벽 그는 연대의 작전명령이라면서 38선상에 있는 북지게봉(402고지)을 공격한다고 발표했다.
새벽3시 현리를 출발하여 5시38선에 도착하여 휴식에 들어갔다가 저녁6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교건이 시작됐으나 부대는 이미 북괴군에 포위되어 우세한 장비로 집중공격을 받게 됐다.
희생자가 속출하고 전세가 불리해질 무렵 대대장강소령은 저항을 멈추고 투항하라고 명령했다.
대부분의 장병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한데 진로를 달리 했던 김인빅중위(7기·함북경흥)의 제8중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3백여명중 1백43명이 생환하고 1백50명이 투항, 월북한것으르 나타났다.
국방부에서 왔다는 민간인은 부대를 안내하기위해 남하한 내무서장 (경찰서장) 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한편 제1대대장 표무원소령(2기·대구출신·당시 25세) 은 5월4일 점심을 마치고는 야간행군을 한다고 대대병력 4백55명을 지결시켰다.
1시쯤 연대본부를 떠나 20km 떨어진 38선 방면으로 북진했다.
저녁6시 38선 부근에 도달하여 저녁을 먹고는 7시 모진교(38교) 를건너 38선을 넘어섰다.
대원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대대장이 진두지휘하는 바람에 그대로 따라갔다.
전 부대가 다리를 건너자 매복하고 있던 북괴군들이 나타나 포위하고 말았다
표무원은 병력을 집결시키고는 『우리는 지금 완전히 포위됐다. 저항해보았자 피해만 날터이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자』 고 권유했다.
2중대장 최동섭중위(5기)가 나서서 한사코 반대하며 돌아가자고 했지만 실탄을 가지고 오지않아 포위망을 힘으로 뚫을 수가 없었다.
이때 북괴군이 위험사격을 가해왔다.
부대가 동요하더니 투합 희망자들은 표소령 주변에 몰리고 귀대 희망자는 최동섭·한정희 (5기·평남)두 증위 인술아래 결사적으로탈츨을 감행했다. 귀환자는 2백39명이었다.
연대본부에서는 5일 새벽 1대대의 탈출 귀환자들이 돌아와 보고를 해서야 비로소 부대 월북사건을 알게 됐다.
연대장 김형일중령이 38교 쪽으로 달려가 마이크를 대고 돌아오라고 방송을 했지만 그 시간에 표무원부대는 이미 화천지방에 가 있었다.
1대대장 표무원은 동경에서 중학을 나온 뒤 일본군에 들어가 군조(중사)로 해방을 맞았다.
귀국후 좌익계사절 군사단체인「국군준비대」에 들어가 있다가 대구 6연대에 지원입대하여 좌익장교 김종석중대에 근무하던중 2기생으로 들어갔다.
2대대장 강태무는 동경 입돈대를 나온 자로서 김창숙선생을 통해 김구선생의 추천을 받아 역시 2기생이됐다고 이들은 모두 8연대장을 거쳐간 최남근과 관련돼 있어 김창룡소령의 숙군 조사반의 조사선상에 떠오르게 됐다.
그들이 공산당에 가입해 있지는 않았지만 김종석·최남근의사상적영향을 많이 받았고 평소 정부와 군에 대한 불평을 공공연히 털어놓아「불평장교」 로 낙인찍혀 있었다.
강태무의 친형인 강태열은 남노당 간부로서 후에 월북했다.
김창룡소령은 표무원·강태무의 구속을 건의했었다.
그러나 당시 이응준참모총장은 그들이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고 38선 경비를 맡은 부대 책임자인 만큼 교육중인 8기생들이 임관, 배치된 다음에 조사하라고 보류시켜 놓은 사이에 윌북 한것이다.
이응준준장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육군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고 채병덕장군이 후임 총장이 됐다.
6여단장 김백일대령, 8연대장 김형일중령은 직위해제됐다.
월북한 두 소령은 북괴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중 강태무는 북괴군 소장까지 올라갔었으나 후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에게 이끌려 영문도 모르고 월북하게 된 다수의 하사관들은 북괴군에 편입돼 있다가 6·25때 탈주하여돌아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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