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In&Out 레저] 지리산 장터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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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에 한 산악사진가가 반야봉으로 지는 해를 사진에 담으러 올라왔다. 점점 깊어지는 노을 속에 들어앉은 사진가가 또 한 점 풍경이 된다.

고갯마루 얘기마루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1300km 산줄기다. 장쾌한 기상으로 뻗어나간 백두대간은 이 땅의 뼈대다.

눈에 보이는 산자락의 뿌리는 모두 백두대간에 닿아 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강이 이 땅을 적시고 기름지게 한다. 사람살이와 문화를 나누는 경계도 이 산줄기에서 비롯된다.

백두대간 옛 고개를 찾아 나선다. 아스팔트에 자리를 내준 고개들이 아니다. 두 발로 강단지게 걸어 넘는 고개다.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산행이 되는 고개다.

고개에 서린 숱한 사연과 인생살이의 애환도 어루만져 본다.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옛 고개를 넘으며 백두대간을 더듬어 본다.

산은 지리산이다. 삼남에 뿌리를 내린 큰 산, 지리산.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가는 백두대간의 시발점이다. 천왕봉(1915m)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 첫 고개는 장터목(작은 사진). 삼국시대부터 장이 섰다는 고개다. 천왕봉 해돋이를 꿈꾸는 이들의 베이스캠프이자 지리산 100리 주릉의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입산=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매표소에서 칼바위를 거쳐 2시간30분. 유암폭포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가 휴식을 부른다. 유암폭포에서 장터목까지는 1.7㎞. 이제부터 고생문이 훤히 열린다. 대가 없이 고개나 정상을 밟는 법은 없다. 어느 코스를 타더라도 지리산 주릉에 서려면 땀을 바쳐야 한다. 곧추 선 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인내심에 한계를 느낄 때쯤 빠끔히 장터목산장이 보인다.

장터목=하늘 아래 첫 고개 장터목. 높이가 1750m나 된다. 설악산 대청봉(1708m)보다 높다. 세석평전에서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릉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터목은 화개재와 더불어 장꾼들에게서 사랑을 받던 고개다. 장터목에 장이 섰던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한다. 봄가을로 지리산 북쪽 함양 마천 주민들과 남쪽 산청 시천 주민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물물교환을 했다. 지게에 바리바리 짐을 지고 오르는 길이 오죽 고달팠을까. 하지만 지리산을 넘지 않으면 몇백 리를 돌아가야 했다. 몸이 고달파도 산을 넘는 게 지름길이었다.

산청에서는 소금이나 해산물이 올라왔다. 함양에서는 종이나 곶감을 가지고 왔다. 특히 음식을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소금은 특별했다. 지금도 마천면 백무동에 사는 노인 가운데는 시천 장날 소금을 사 장터목을 넘던 추억을 가진 이가 있다.

그러나 세월은 변했다.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현대사를 거치면서 지리산의 옛 고개는 인적이 끊겼다. 그 사이 지리산의 산골까지 신작로가 뚫렸다. 이제 애써 고갯마루까지 소금가마를 져 나르지 않아도 됐다.

장터목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71년, 지리산장이 지어진 뒤부터다.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후 탐방객 관리를 위해 장터목에 산장을 지었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 장터목은 그때부터 산꾼들로 넘쳐났다. 지리산장은 그 후 장터목산장으로 명패를 바꿨다. 97년 통나무집으로 새롭게 단장한 뒤부터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직영한다. '조난을 당하거나 악천후를 피하기 위해 머무는 곳'이라는 뜻에서 대피소라 부르지만 아직도 산꾼에게는 산장이 더 친숙하다. 장터목 대피소에는 강달용(54) 팀장을 비롯해 3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산책=천왕봉으로 산책을 간다. 혹시 이 구름 걷히면 천하가 발아래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천왕봉까지는 1.7㎞. 장정 걸음으로 40분 남짓한 거리다.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천왕봉에 섰다. 백두대간의 종착역이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비석에 새겨진 각자는 언제 읽어도 불도장처럼 뜨겁다.

천왕봉에서 한 시간쯤 서성거렸을까. 장터목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하늘이 걷힌다. 반야봉과 노고단, 만복대의 큰 멧부리가 운해 위로 솟았다. 그래 이 맛이다. 일 년에 열두 번을 와도 주릉 코빼기도 못 볼 때가 많다. 그래도 지리산으로 발길이 놀려지는 것은 오늘 같은 행운 때문이다. 바위틈에 피어난 투구꽃과 벌개미취도 한가롭게 가을볕을 즐긴다.

하산=장터목에서 하룻밤 신세 진 산꾼들은 복 받았다. 그들은 반야봉 정수리에서 타는 저녁놀을 봤다. 주릉을 따라 흘러가는 은하수도 봤다. 새벽 댓바람부터 부지런을 떤 이들은 천왕봉에서 해돋이도 봤을 게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그 장관 말이다.

하산은 백무동이다. 제석봉 산허리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부드럽다. 소지봉에서 참샘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가파르다. 백무동을 들머리로 잡은 이들이 진땀을 흘리는 곳이다. 돌계단 중간에 쉬었다 가라고 참샘이 있다. 참샘을 지나면 물소리가 들린다. 종점이 가까웠다는 증거다. 매표소를 지나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본다. 그 사이 지리산은 구름 뒤에 꽁꽁 숨었다.

지리산=글.사진여행작가 김산환

■산행기점인 중산리로 가려면 진주를 경유한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주까지는 고속버스가 20~50분 간격으로 운행(오전 6시~자정)한다. 일반 1만5600원, 우등 1만8500원, 심야우등 2만원.

부산 사상터미널에서도 중산리로 가는 직통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055-741-6039)에서 중산리까지는 약 1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있다. 요금은 4300원, 1시간쯤 걸린다.

■무박으로 산행을 하려면 심야우등을 타고 진주로 간 다음 첫차를 타고 중산리로 간다. 중산리~천왕봉~장터목~중산리 회귀산행은 8~9시간쯤 걸린다. 하산을 백무동으로 잡아도 시간은 얼추 비슷하다.

■장터목산장에서 1박을 할 요량이면 중산리에서 곧장 장터목으로 가는 게 좋다. 무거운 배낭은 산장에 두고 해돋이를 보러 몸만 갔다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취사도구는 챙겨가야 한다. 주말에는 지리산국립공원 홈페이지(www.npa.or.kr/chiri)에서 사전에 예약을 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중산리와 백무동에도 숙박할 곳은 많다. 중산리는 물소리바람소리(055-972-8360), 백무동은 지리산반달곰펜션(055-962-5353)이 최근에 지어진 산장이다. 백무동에서 산채비빔밥이나 동동주에 파전을 곁들이면 꿀맛이다. 느티나무집(055-962-5345)은 흑돼지소금구이(1인분 6000원)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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