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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웃음 녹아든 파우더 스노 … 낮에도 별 반짝 ‘황홀한 겨울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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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앴다. 일본 열도 최북단 섬 홋카이도(北海道)는 말 그대로 눈 천지였다. 두툼한 흰색 융단이 깔린 대지 위로 날마다 새 눈이 수북이 쌓였다.

홋카이도를 여행했던 나흘 내내 하루에 40㎝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눈보라로 사위를 분간하지 못했고, 고속도로가 통제돼 발이 묶이기도 했다. 불편했지만 황홀했다.

한 줌의 볕만 있어도 눈밭이 빛났다. 홋카이도는 낮에도 별을 볼 수 있었다. 설원에 박혀 반짝이는 별이었다.

겨울 홋카이도는 순백의 세상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작나무가 새하얀 대지와 어우러졌다.

연간 평균 강설량 597㎝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홋카이도는 명도만 있는 땅이었다. 지붕도 도로도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맑고 파란 하늘을 기대했지만 희뿌연 하늘은 연방 눈을 쏟아냈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아사히카와(旭川) 공항에 도착한 날짜가 지난 12월 24일이었다는 사실. 적어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분명했다.

홋카이도는 북위 43도에 위치한 일본 최북단 섬이다. 섬 하나가 남한 면적의 84%에 이르지만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하다. 일본에서 가장 혹독한 겨울이 이곳에 찾아든다. 최저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도 문제지만, 상상 이상으로 내리는 눈과 맞닥뜨려야 한다. 홋카이도의 대표 도시 삿포로(札幌)의 연간 평균 강설량이 597㎝이다. 동해·오호츠크해·태평양 등 차가운 바다를 지나며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홋카이도에 눈을 토해낸다.

홋카이도의 중앙에 아사히카와가 위치해 있다. 삿포로가 아니라 아사히카와를 홋카이도 여행의 관문으로 삼은 것은 설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비에이(美瑛)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비에이까지 삿포로에서는 자동차로 3시간30분 거리지만, 아사히카와에서는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비에이 구석구석을 여행하기가 어려워 렌터카를 이용했다.

비에이는 도쿄(東京)와 비슷한 크기지만, 인구는 채 3만 명도 안 된다. 한데 이 시골 마을에 한해 150만 명이 찾아온다. 대단한 것은 없다. 낮고 널찍한 언덕에 듬성듬성 뾰족한 지붕을 덮은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뿐이다. 그 한갓진 풍경이 은은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비에이의 구릉은 네모난 밭으로 개간됐다. 봄부터 가을까지 감자·옥수수·보리·해바라기가 서로 다른 색감을 뽐낸다. 겨울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어디가 밭이었는지, 어디까지가 도로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너른 대지를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감싸고 있을 뿐이다.

지평선 위로 나무들만 불쑥불쑥 솟아 있다. 개중에는 일본 CF의 배경이 되면서 스타가 된 나무도 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이 깃든 출사 명소다. ‘겐과 메리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 등 고유 이름도 붙어 있다. 심지어 내비게이션 좌표까지 있다. 비에이 여행은 이 나무들을 찾아다니는 여정으로 압축된다. 눈보라가 불었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궂은 날씨였지만 자전거를 끌고 나와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택시를 통째로 빌린 여행자도 여럿 보았다.

겨울 비에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문율이 있다. 나무 근처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앞서 다녀간 사람의 발자국이 피사체에 다가갈 수 있는 경계가 됐다.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존재는 야생동물밖에 없었다. 동틀 녘 야생 여우의 발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푸른 발자국이 마음속에 여운처럼 찍혔다.

1 비에이의 인기 출사 명소인 마일드세븐 언덕. 2 삿포로 스스키노 거리를 지나고 있는 노면 전차. 3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내리는 비에이 흰수염폭포.

눈의 나라 사람들이 사는 법

1년의 3분의 1을 겨울로 보내는 사람들은 이미 겨울나기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스노체인을 감은 차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 스노타이어만 장착한 차들이 도로 위를 내달렸다. 이번 렌터카 여행에서 핸들을 잡은 손정희(42)씨는 “홋카이도의 눈은 물기가 적기 때문에 뭉치지 않고 잘 얼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내리는 눈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함박눈이지만, 홋카이도의 눈은 건조한 가루눈이다. 파우더 스노(Powder Snow)라고도 한다. 마찰력이 작은 덕분에 파우더 스노 위로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면 미끄러지듯이 활강할 수 있다.

홋카이도에서 눈은 엄청난 노동과 돈을 동반한다. 홋카이도의 겨울 아침은 제설차 소리로 시작된다. 홋카이도의 도로는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양 옆으로 80㎝씩 넓다. 제설차가 긁어 놓은 눈을 높게 쌓아 올릴 공간이다. 겨울 끝자락이 되면 도로 양 옆에 눈으로 쌓은 벽이 사람 키를 웃돌 만큼 높아진단다.

인구 190만 명의 삿포로시는 홋카이도에서 제설작업에 가장 많은 예산을 쏟아 붓는다. 올 겨울 제설 비용으로 책정한 시 예산이 128억 엔이다. 우리 돈으로 약 1168억 원을 눈에 쏟아 붓는 셈이다. 삿포로시가 제설해야 하는 도로 길이를 전부 합하면 5200㎞에 이른다. 서울과 부산을 13번 오가는 거리다. 시에서 운영하는 제설차만 1000여 대, 작업 인원은 3000명을 넘어선다.

시민도 바지런하다. 집 앞에 쌓인 눈은 자신들 몫이다. 잔디 깎는 기계처럼 생긴 소형 제설기를 집마다 갖추고 있다. 홋카이도 사람에게 눈은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삿포로에서 만난 야마자키 요시카즈(山崎芳和·60)는 “홋카이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눈을 치워야 한다. 겨울이 되면 15만엔(약 136만원)을 내고 사설 업체에 제설작업을 맡겨버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홋카이도 사람들도 눈폭풍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가루눈이 날려 온 하늘을 덮어버리면 1m 앞도 분간하기 어렵다. 고속도로가 통제되는 건 예삿일이다. 12월 26일 오전 오타루(小樽)에서 삿포로로 이동하려는 중에 이 일을 겪고 말았다. 정오께 돼서야 통제가 풀려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레서팬더. 아사히야마 동물원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도 눈은 홋카이도의 축복이었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 된 오타루 운하와 붉은 벽돌건물이 설경과 어우러졌다. 아사히카와 아사히야마(旭山) 동물원의 펭귄과 북극곰은 추운 날씨에 신이 났다. 삿포로 눈축제를 한 달 남짓 앞둔 삿포로도 들썩였다. 오오도리(大通り)공원에 대형 설상과 빙상을 떠받칠 철제 구조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퉁탕퉁탕 망치질 소리가 흥겨웠다. 축제는 매년 2월 5일부터 11일까지 1주일 동안 열린다.

홋카이도의 눈에는 땀과 웃음이 함께 녹아든 듯했다. 대자연에 순응하고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홋카이도의 겨울을 빚어내고 있었다. 척박하고 가혹하지만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여행정보=아시아나항공이 2월 28일까지 인천~아사히카와 노선을 한시 취항한다. 인천에서 오전 9시45분 출발하고, 아사히카와에서는 오후 2시 출발한다. 비행시간은 3시간 가까이 걸린다. 수·토요일 주 2회 운항한다. 비에이 지역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힘들다. 렌터카를 빌리거나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게 좋다. 인터파크투어(tour.interpark.com)의 ‘북해도 핵심일주 5일’ 상품이 아시히카와 공항을 이용한다. 삿포로·비에이·오타루 등을 돌아본다. 홋카이도산 털게 시식도 포함돼 있다. 99만9000원부터. 02-3479-4380. 렌터카는 5인승 소형차 기준 하루 4000엔(약 3만6000원) 정도다.

한겨울 홋카이도를 여행하려면 방한에 신경 써야 한다. 1월 삿포로 평균기온은 영하 2.5도, 아사히카와는 영하 6.6도다. 온종일 눈밭을 걸어야 하니 방수 신발은 필수다. 양말도 여분을 챙기는 게 좋다. 신발에 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스패츠도 도움이 된다. 삿포로 도심 곳곳에 구두 수선집이 있다. 2000엔(약 1만8000원)을 내면 신발 바닥에 미끄럼 방지 패치를 붙여준다. 겨울 홋카이도에서 꼭 맛봐야할 음식은 털게다. 털게는 알을 배는 5~7월이 제철이지만 겨울 털게 맛도 여름 못지않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몸속에 살을 꽉 채우기 때문이다. 털게는 찐 다음 차게 식혀 먹어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삿포로의 카니혼케(かに本家)가 게 요리로 유명하다. 털게는 색깔과 크기에 따라 17등급으로 나뉘는데 카니혼케는 상위 3등급까지만 사용한다. 모두 홋카이도산이다. 81-11-551-0018.

글·사진=양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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