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지 않는 혁명의 열기| 외대 김정위 박사 혁명 4주 맞은 이란 방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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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외국어대학 이란어과장 김정위박사는 이란혁명 4주년을 맞아 지난l월초, 약 2주간에 걸쳐 이란을 다녀왔다. 김교수는 이란회교정부의 초청을 받은 50여개국의 인사들과 함께 이란의 각계 지도자들을 만났으며 전선을 비롯, 이란 전역을 둘러보았다. 다음은 김교수가 본 혁명으로 변화한 이란의 모습이다.

<편집자주>
동서 양 진영의 대치선인 중동지역에 동방도 서방도 부정하는 새 물결이 이슬람이란 기치아래 이란에 생동한지 4년이 흘렸다. 이 기간 중에 혁명주체세력간의 노선투쟁, 미 대사관인질사태, 이란-이라크 전쟁 등으로 이 지역은 세계 매스컴의 눈길을 집중시켜왔다.

<"미·소에 죽음을">
거듭된 내외적 동요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81년 「바니-사드르」대통령 축출이후 혁명의 지도노선이 확정되어 82년 한 해 동안 국내 혁명기반 구축 등의 성과를 올렸다. 따라서 2월11일의 혁명4주년은 세계에 이슬람혁명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뜻깊은 날이었다.
이란혁명지도층의 국가관과 세계관은 오늘날 전국을 휩쓰는 구호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절대자는 알라, 영도자는 「호메이니」, 반신권론자에게 죽음을 미국에 죽음을, 소련에 죽음을, 위선자 「사담」에게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이 구호 속에서 이란은 알라의 신권에만 순종하고 미소 양국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밖에 주변 이슬람국가의 지도층은 모두 이름만이 모슬렘이지 실체는 이슬람의 적인 미소의 앞잡이로 간주하며 이스라엘과 주변 이슬람국가의 지도층은 당장 제거해야할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필자는 혁명직후인 79년 여름과 겨울에 이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때는 아직 거리의 모습은 혁명 전과 별로 차이가 없었고 혁명노선도 선명하지 않았다. 화폐도 여전히 「팔레비」시절의 것이 그대로 유통되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행자는 혁명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의 방문에서는 보고 느낀 것이 온통 혁명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길거리에 내걸린 이란국기는 이미 옛날의 것이 아니었고 남자들의 복장에서 넥타이는 사라졌으며 여자들의 양장은 차도르에 뒤덮여 까맣게 되었다. 이슬람의 승려복도 눈에 띄게 늘어나 중세로 되돌아간 듯 했다.
최고종교지도자 「호메이니」옹이 성직자임은 물론이지만 대통령「하메네이」, 국회의장 「라프산자니」, 대법원장「아르다빌」 등도 모두 성직자출신이고 보면 이란이 승려국가 내지 신권국가임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국회를 방문하여 그 토론광경도 지켜보았다.

<넥타이도 사라져>
이란 국회는 행정부보다 권한이 크기 때문에 여기서 결정되는 법규는 곧 시행되어 국민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토론은 전국에 방송되고있으며 각 의원들의 책상마다 마이크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국회와는 달랐다.
토론을 마치고 정회하는 사이에 국회의원들이 밖으로 나와 끼리끼리 어울려 방바닥에 주저앉아 차를 들면서 각론을 펴는 광경은 우리 나라의 시골 장날 막걸리꾼들의 풍경과 흡사했다. 더구나 국회의원의 경호원들도 같이 끼어앉아 각 론에 참여하는 것은 모슬렘형제 간의 평등의식에서 유래한다지만 이 문화에 생소한 나의 눈에는 별난 광경이었다. 「팔레비」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2월7일에는 50여개국에서 온 약 5백명의 외국손님과 약 2백명의 이란인들 이 의자도 없는 대통령의 접견실 방바닥에 앉아서 「하메네이」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대통령은 이란의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관해 언급이 없자 초조한 한 이란인 방청객은 일어나 연설을 중지하고 전쟁에 관해서 한마디 할 것을 요청했다.

<세계상품 전시장>
대통령은 웃으며 응답하였다. 이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필자에게 흥겨움조차 주었다.
「호메이니」옹의 연설은 그의 사저에 접해 있는 자마란성원에서 행해졌다. 5백명의 외국손님 외에 이란 각 지역에서 올라온 열성혁명동지들도 5백명정도 참석하였다.
「호메이니」옹은 연설에 앞서 약 20분간 청중들의 시국관을 들었다.
몇몇 청중이 일어나 모슬렘의 세계정세판단과 이란의 입장을 토론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외국손님도 있었다. 「호메이니」옹은 인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그제서야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지도자들은 암살의 위험 때문에 청중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면서도 대중과는 항상 접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란은 오늘날 세계의 상품전시장이다. 이란사의 기관소총류는 북괴제이고 그들이 식사 때 사용하는 수저는 한국제이다.
이란은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로 약2백50억달러의 외화 매년 벌어들이고 있다. 이중에서 약1백억달러는 국민의 생필품수요를 위해 소비하고, 나머지는 군수품과 농촌건설에 충당하고 있다. 이라크와의 전쟁은 지구전을 펴 승리로 이끌자는 것이 이란의 전술인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은 남부 중부 북부전선을 번갈아 가면서 공격을 한다. 4천만명의 이란인은 1천5백만명의 이라크인에 비하여 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에 건설과 전쟁을 동시에 추진하며 국민의 단결심을 고취하여 혁명기반용 구축하자는 속셈인 것 같다.「팔레비」시절보다 1인당국민소득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혁명과 전쟁의 열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란국민은 요즘도 『싸우자! 싸우자! 최후의 승리까지』라는 외침 속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다. <김정위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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