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2)제 79화 육사졸업생들(95)-여수진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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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수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대통령은 동경에 가 있었다.「맥아더」장군의 초청으로 10월19일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주일공관을 통해 반란소식을 전해듣고 바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23일 국무총리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장군을 경무대로 불렀다.『도대체 이총리는 뭘 하고 있나. 그 반란이란게 터진지 닷새 째가 되는데 진압군은 아직 순천에만 머물러 있다고 하더만. 이거 국내외적으로 창피해 못견디겠군. 민주국가를 표방하고 경부수립을 선포한 이 마당에 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군·경을 동원해서 빨리 빨갱이를 해치워.』
이날 이대통령은 반란사건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인명을 보호할 것이며 반역도당은 군법에 따라 엄벌할 것이니 관민이 일치하여 반란진압에 협력하라는 내용이었다.
하루 전인 22일 정부는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범석총리는 반도들에게 반란 지도자를 사살하고 귀순하면 극형을 면해준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같은 일련의 정부 조치는 순천이 탈환된 뒤의 때 잃은 조치였다.
여수에 대한 총공격은 8월24일에 개시됐다. 순천탈환작전과는 달리 육해·공 병력이 집중 투입된 일제작전이었다. 주력은 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소령의 증강된 1개 대대 병력이었다.
이 작전은 송호성사령관이 직접 진두지휘 했다. 그는 장갑차에 타고 선발부대를 이끌고 여수를 향해 남진했다.
이 선발부대에는 종군기자단이 따르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군기자단이었다.
전남일보 발행인을 지닌 김남중씨는 당시 광주에 있던 호남신문 편집국 차장(부국장)이었는데 순천탈환작전을 취재키 위해 이미 순천에 가 있었으나 여수종군기자단에는 끼지 않았다.
반란군에 점령된 여수에서는 호남신문의 사진부장 이경모기자(현재 이화컬러사장)와 여수 주재 김재혁기자가 맹활약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반란의 시초부터 민완을 발휘하여 20일 아침 편집국에 『여수 14대 반란, 경찰서가 불타고 경찰관 수십명 순직, 인민해방군 자칭한 반란군 순천으로 북진』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송고 했었다.
군의 검열에 걸려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계속 기사를 보내오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김재혁기자는 좌익계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취재·송고할 수 있었고 사건의 내막도 소장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여수로의 진격행군이 계속되는 동안 송호성사령관은 장갑차를 타고 권총을 휘두르면서 지휘관들을 독려했다. 그는 때때로 장갑차 위에 올라서서 호령을 해가며 지휘하기도 했다.
부하들이 포승을 가져와 송장군의 두 발을 장갑차의 밑바닥에 동여매면서『각하, 미안합니다. 신변보호상 할수 없읍니다. 각하는 개인이 아닙니다』고 하는 바람에 결박상태로 지휘해야했다.
여수를 눈앞에 보며 미평에 이르자 반란군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약 l개 대대가 양편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다가 반격해온 것이다.
총성이 나자 대원들은 잽싸게 망에 엎드려 피했으나 송장군은 묶인 상태로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나중에 부관이 달려가 결박을 풀고 장갑차에서 뛰어내리게 했다.
그때 송장군은 적탄이 귀를 스쳐 피를 흘리며 실신했다. 송장군은 허리를 다치고 고막이 찢어져 병원으로 질려갔다. 사령관의 장갑차 뒤쪽에 있던 AP통신의「크린튼」기자도 몸에 두발의 총탄을 맞고 후송돼 갔다.
전투사령부는 일단 진격부대를 절수시켰다가 26일 제공격을 시작했다. 이때는 백운산 방면에서 적을 추격하던 백인화소령의 12연대와 부산 5연대의 1개대대, 대전 2연대의 일부병력(2여단 군수참모 함병선소령 지휘)도해 육 양면으로 투입했다.
선봉부대가 여수에 진입한 것은 26일 밤이었다. 시가전에서는 학생반란군들의 저항이 완강했다. 특히 여수인민위원장 송욱이 교장으로 있던 여수여중 학생들은 99식 총을 들고 악질적으로 도전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1개 대대를 이끌고 여수에 상륙한 김종원대위 (1기생 후에 치안국장역임·작고)는 손수 일본도를 빼어들고 잠혀온 반란군들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계속>장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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