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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오바마엔 "원숭이" 집무실엔 애플 … 평양의 '반미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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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반미 사상교양 시설인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을 찾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노동신문]

북한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원숭이’ (27일 국방위 담화)운운하며 발끈했습니다. 유엔 대북 인권결의를 주도했고, 코미디 영화 ‘인터뷰’ 상영을 강행토록한 장본인이라며 화풀이를 한 겁니다. 둘 다 북한이 ‘최고존엄’으로 칭하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을 겨냥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관영 선전매체에서 욕설에 가까운 비방을 퍼부어야 하는 북한 기자·아나운서를 보면서 안쓰러움이 앞섭니다.

 ‘반미(反美)의 나라’ 평양 공화국에선 미국을 저주하는 게 생활입니다. 주민들에게 미국은 분단의 책임자이자 6.25전쟁 도발자, 대북 침략전쟁의 주범 등으로 각인됩니다.

 지난달 말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을 찾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반미의식도 만만치 않아보입니다. 미국을 ‘미제 살인귀’라 부르며 “적에 대한 환상은 곧 죽음”이라고 말했는데요. 노동신문은 신천박물관을 “미제승냥이들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고발장”이라고 주장했죠. 6·25 전쟁 중 좌우 대립으로 발생한 참극의 가해자를 미국으로 날조했고 , 주민 3만5000여명을 학살했다며 그 박물관을 반미 교육장으로 삼는 겁니다.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운구차로 등장한 미국 포드사 링컨컨티넨탈. [노동신문]

 이런 모습은 집권 초기와 다릅니다. 김 위원장은 2012년 7월 모란봉악단 공연 때 미 자본주의의 상징 미키마우스 캐릭터가 등장한 레퍼토리를 관람했는데요. 국제사회에서 “서방 유학(스위스 베른국제학교)을 한 김정은은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죠. 전미프로농구협회(NBA) 출신 데니스 로드먼을 평양에 초청해 농구경기를 벌이자 마찬가지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김 위원장의 이런 엇갈린 행보 때문에 주민들은 적잖이 혼돈을 느낄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군부대 방문 때는 “미제 침략자를 소멸하라”는 지시를 하고, 집무실엔 애플 컴퓨터를 쓰는 최고지도자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북한을 취재·보도하며 풀리지 않는 반미관련 수수께끼도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왜 마지막 가는 길엔 운구차로 미제 링컨컨티넨탈을 이용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30살 청년지도자 김정은으로선 미국이란 큰 벽앞에 좌절과 열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북제재망은 평양을 더욱 옥죄는 형국입니다. ‘최고존엄’을 부각해 권력기반을 다지려했는데 스타일을 구겼죠. 핵과 미사일 위협도 약효가 떨어졌고, 미국인 인질외교도 먹히지 않습니다.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 때는 조명록-올브라이트 특사교환이란 반짝 해빙기도 있었지만, 이젠 꿈같은 얘기가 됐죠.

김정은 집무실 책상에 놓인 애플 컴퓨터. [노동신문]

 가시돋친 평양발 대미 비난의 행간엔 워싱턴에 대한 갈구도 드러납니다. “다 부숴버리겠다”는 선전매체의 파국적 언술을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왜 우리만 미워하냐”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또 53년만에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선언한 쿠바마저 떠나고 반미전선에 홀로 남게된 김정은 정권의 고립감도 커보입니다.

 고모부 장성택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은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인터뷰’ 제작사인 소니에 대한 해킹은 오히려 이 영화에 ‘만원사례’라는 덤을 주기도 했죠. 더 이상의 패착은 곤란합니다. 70년 묵은 반미 이데올로기에 홀로 갇혀있기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릅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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