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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육영수 여사의 보리떡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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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1. 1960년대의 서울엔 지하철 대신 땅 위로 전차(電車)가 다녔다. 전차엔 ‘차장(車掌)’이 있었다. ‘안내양’이라고도 하던, 이젠 추억이 된 이름이다. 1964년에서 66년 사이의 어느 날. 성심여중생 한 명에게 전차의 차장이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박정희 대통령 따님이 다닌다면서요”라고 물었다. 소녀는 “예”라고 했다.

 ▶차장=“(대통령 딸인데도)전차 타고 다닌다던데….”

 ▶소녀=“그런가 봐요.”

 ▶차장=“그 학생, 공부는 잘해요?”

 ▶소녀=“그런대로 하나 봐요.”(공개된 성적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3년간 학급 1등이었다.)

 ▶차장=“키는 얼마만 해요?”

 ▶소녀=“저만 해요.”

 무심하게 차장과 대화를 나누던 소녀는…중학생 박근혜였다. ‘땅콩 회항’ 사건을 일으킨 재벌그룹 회장의 따님과는 달리 대화 속에 어떤 우월적 존재감, 특권의식 같은 건 찾기 어렵다. 소녀 박근혜가 그날 청와대에서 차장과 나눈 얘기를 했더니 육영수 여사가 특히 즐거워하며 등을 토닥거렸다. 박 대통령은 저서 『나의 어머니 육영수』에 “그때 어머니의 얼굴엔 딸을 잘못 가르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흡족함이 역력했다”고 적었다.

 #2. 『나의 어머니 육영수』

 그런 어머니인데 박 대통령의 인생엔 커다란 빈자리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는 아마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쓴 책일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넘기다 육 여사가 1971년 개발했다는 ‘보리 떡국’ 얘기에 눈길이 갔다. 보리밥, 보리굴비, 보리술, 조리퐁 등 주변에 보리로 만들거나 응용한 음식이 많지만 ‘보리 떡국’? 어떤 건지 감은 왔다. 그 시절 학교에 흰 쌀밥 위에 보리밥으로 포장(위장)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기억이 있어서다. 70년대는 식량 사정이 어려워 정부가 혼분식을 장려했고, 학교에선 도시락 검사까지 했다. 그때 육 여사는 보릿가루를 사용해 이것저것 발명을 해보려 했나 보다. 배고픈 나라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의 혼신이었다. 하지만 보리 떡국은 구수한 맛은 좋았으나 가루가 너무 쉽게 풀어지는 바람에 미완성이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건 몇 년 뒤 불행한 사태로 영구 미완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3. 대선공약 어머니 같은 대통령

 이 두 개의 소박한 일화가 오늘의 박 대통령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박 대통령은 이기적 목표 따윈 지워 갔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때 이렇게 약속했다. “어머니와 같은 리더십으로 지역과 계층, 세대를 넘어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해내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할 때 ‘어머니 육영수’를 마음속에 놓지 않았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관계 속에 장력(張力)만 팽팽했던 집권 2년이어서일까. 요즘 박 대통령을 말할 때 아쉬운 것이 ‘어머니 같은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을 제법 봤다. 박 대통령이 올 한 해 자주 사용한 단두대, 암덩어리, 진돗개 같은 강력한 표현에 가리운 것만은 아니다. 좋은 말도 세 번 하면 듣기 싫은 법이니 소통 때문이네 뭐네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아무리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해도 한 해 한 번씩은 ‘과정’을 돌아볼 필요는 있다.

 종북(從北)을 서리 맞게 한 것까진 좋은데, 이념적인 문제엔 따분하기까지 하고, 양보란 전혀 하지 않고 꽉 막혀 있진 않았는지, 설령 어머니 같은 모습을 보였더라도 그것이 ‘일부의 어머니’ 혹은 ‘편애하는 엄마’ 같은 모습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알게 모르게 ‘우리가 처음 생각한 대통령이 아니었다’고 생각을 고쳐 가는 사람을 스스로 만들어낸 건 아닌지 말이다.

 곧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한다. 대통령의 형상을 어머니라는 딱 하나의 관점에 가둘 순 없지만, 과연 어머니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가 소진돼 버린 거였는지, 아니면 어머니 같은 대통령으로의 변신을 위해 잠시 시간을 유예해둔 것인지 알 수 있는 자리였으면 한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