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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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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때 내가 고은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여학교 선생처럼 어딘가 수줍고 거세된 듯한 부드러움이었다. 흰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는데 그는 두 손을 책상에 나긋나긋하게 짚기도 하고 깍지도 꼈다가 하면서 서성거렸다. 드디어 이문구가 우리를 소개했다. 내가 악수를 하려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맥을 놓은 채 내밀었고 나는 그 손가락 끝 부분을 잡은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섬세한 관능의 느낌이었달까. 그를 새로운 문학운동의 중심에 세우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문구와 박태순이었다. 비슷한 또래였던 이호철의 인상과는 다른 소심함에 비해서 1970 년대의 고은은 그야말로 자기 시구를 연상시키도록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자신을 시대 속으로 던져 밀어붙였다. 박태순의 찬탄 섞인 비판이 생각난다.

-그는 대단해. 정치도 알고, 부지런하고, 매인 데 없고. 저 매명에 대한 끝없는 탐욕만 뺀다면 말이야.

그것은 우리들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그를 전적으로는 신뢰하지 못했다. 그는 바둑은 두지 않았지만 세상 인사의 수를 잘 읽었는데 나는 그 점이 늘 못마땅했다. 그의 고희 자리에서였던가 덕담을 하는 자리에서 내가 쓴소리 겸 감탄을 섞어서 이렇게 말했던 생각이 난다.

-선생의 특성은 느닷없는 비약과 가차 없는 작별인데, 앞으로는 뒤에 즐비한 상처들도 좀 돌아보실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시영이 나중에 내 대신 정리했다.

-그는 중이요. 일단 지나가면 안 돌아와요.

나도 그렇겠지만 그도 찬반양론을 온 인생에 짊어지고 다닌 사람이다. 그의 비약이 그의 재간이자 덫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저만한 예술가가 동시대에 몇이나 있으랴. 처음 만나던 무렵에 아마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조직을 준비하던 때였을 것이다. 우이동에서 모임이 있었고 나는 그제야 모친을 모시고 함께 살았는데 부근에서 술을 마시고는 고은을 집으로 데려갔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얘기가 나왔지만 난세의 살림살이를 다 겪은 홀어미로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가 하룻밤 묵고 지나갔는데 모친은 그에 대해서 얘기하던 것이다.

-그 사람 척 보니 룸펜이더라야.

내가 모친의 인물평을 그대로 그에게 전달했고, 그건 아마도 50년대의 냄새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 무렵의 일이다. 이문구가 고은과 나와 함께 지방에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그 무렵에는 어찌 된 일이었는지 이문구와 전라도며 충청도며 문학강연 비슷한 나들이를 많이 다녔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것이 한국문학지의 지방 필자와 구독자 겸 후원층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으리라. 느닷없이 안동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는 김주영이 연초 조합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으며 저희끼리 문학동우회 비슷한 모임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등단하기 전의 일이다. 청량리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영주에서 내려 갈아타는 여정이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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