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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세시풍속은 죽지 않는다, 시대 따라 변화할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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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호 24면

동지(冬至) 하면 떠오르는 게 팥죽이지만 이제 한 가지를 더 떠올리게 됐다. 바로 달력이다. 조선 후기 문인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1840년께)에서 동짓날 풍속을 읽고 나서다.

달력 선물 시즌

“이날 임금은 모든 관원들에게 황색 표지를 한 황장력(黃粧曆)과 백색 표지를 한 백장력(白粧曆)을 반포한다. (중략) 대개 서울의 옛 풍속에 단오의 부채는 관원이 아전에게 나누어주고 동짓날의 달력은 아전이 관원에게 바친다고 하여 이것을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하며 이러한 선물 관행이 고향의 친지와 묘지기 마을, 그리고 농장의 농민들에게까지 파급된다.”

2015년 탁상용 달력들.

이 글을 읽고 나니 요즘 사무실로 부지런히 배달되어 오는 각 기업과 기관의 2015년 달력에 새삼 눈길이 갔다. 내가 일하는 영어신문 코리아중앙데일리의 외국인 에디터들은 이런 풍습을 재미있어 한다. 수석 에디터 안토니 스패스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기업·기관이 자체 달력을 제작하고 선물하는 일이 있지만, 한국에서처럼 활발하진 않고 또 달력 디자인도 한국 달력(특히 명화나 현대미술이 들어간 달력)만큼 호화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풍속이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특히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도 요즘은 스마트폰의 일정 관리 기능 때문에 종이달력 산업이 예전 같지는 않다. 하지만 특이한 달력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배우 송일국의 세 쌍둥이 아들 사진을 담은 일명 ‘삼둥이 달력’이 판매 개시 3일차인 26일 오후 현재, 벌써 15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MBC TV의 ‘무한도전’ 달력도 해마다 몇십만 부씩 팔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물용으로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처럼 연말에 독특한 달력을 찾고 선물하는 풍속은 동아시아 외에는 흔치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풍속이 어디서 왔을까? 결국 동지에 책력을 선물하는 조상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동국세시기』에 나온 대로 우리 조상이 책력을 선물로 주고받던 시기가 현대의 우리가 달력을 주고받는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통념대로 조상들이 철저히 음력을 기준으로 활동했다면, 지금은 음력설이 아직 먼 시기인데 어찌 된 일일까? 요즘 여러 민속학자가 지적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조상은 음력만 따른 것이 아니라 음력과 양력을 함께 사용했다. 입춘·입동 등의 24절기는 태양의 주기에 따른 것으로 양력이다.

특히 24절기 중 동지는 『동국세시기』에 나온 대로 ‘아세(亞歲), 즉 ‘작은설’로 불렸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로 이날을 기점으로 해가 다시 길어진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인들은 동지를 태양이 소생하는 날로 중요하게 여겼다. 페르시아인·로마인·게르만인 모두 동지 축제를 성대히 지냈으며, 그들을 흡수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가 동지 직후인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한 것이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어느 계절에 태어났다는 언급이 없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고대 중국 주나라 역시 동지가 빛과 생명력이 부활하는 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동지를 새해의 시작인 설로 삼았고 그 전통이 당나라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고려 말 충선왕 이전까지는 동지를 설로 쇤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음력설이 ‘우리의 참된 전통’이라고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고려 때까지는 양력설을 쇠었던 것이다. 물론 그 양력설은 동지로서, 지금 우리가 서구의 영향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의 1월 1일과는 다르지만.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가 양력을 주로 쓰면서 음력 기반 명절은 쇠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세시풍속이 모두 죽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굳이 음력 3월 3일 삼짇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봄에 꽃놀이를 간다.

우리의 양력 기반 24절기 세시풍속도 동지 때 달력 선물처럼 변화된 형태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세시풍속을 조선시대 그대로 고집하며 그 사라짐을 한탄하기보다는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 변화된 모습과 전통과의 숨은 고리를 밝히고 단단히 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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