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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다국적 교향악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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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맨손 지휘를 즐기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가끔 이쑤시개를 들고 무대에 선다. 그는 2일 베이징 자금성 연주에서도 전 날 식당에서 가져온 이쑤시개를 들고 지휘했다. 게르기예프는 "오른손 모양을 고정하는 효과 외에 허전한 손을 달래주기 때문"이라고 이쑤시개 지휘의 변을 털어놨다.

▶ 관중의 환호에 인사하는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악장 율리아 베커(左)와 빈 필하모닉 악장 라이너 큐흘. [사진제공=에르메네질도 제냐 코리아]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이 끝나자 제1 바이올린 파트의 맨 앞줄 악장 자리에 앉아 있던 라이너 큐흘(빈 필하모닉 악장)이 뒷 줄로 자리를 옮겼다.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1막 전주곡'에서는 '서열 5위'로 떨어졌다. 다른 교향악단 연주회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 연출됐다. 제1 바이올린 파트의 단원 16명 모두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악장들이기 때문이다. 굳이 출신 교향악단끼리 서열을 매기자면 큐흘이 악장 자리를 지켜야 옳다. 하지만 작품마다 악장을 바꿔 가는 민주적 방식이 이 오케스트라의 이념이다.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6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2일 베이징(북경) 자금성 콘서트홀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WOP.음악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공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달 27일 런던 프롬스 축제에서 시작해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베이징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WOP의 창단 10주년 기념 공연이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 기념공연이다.

WOP는 199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당시 유엔 사무총장 부르토스 갈리가 유엔 창설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안해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경이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의 악장.수석급 단원들로 창단했다. 2년 후 타계한 솔티의 지휘봉을 이어받은 게르기예프가 이끌어오고 있다.

'윌리엄 텔 서곡'은 WOP의 창단 공연 때 연주된 작품. 나머지 프로그램은 프랑스.독일.러시아 등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 출신 작곡가의 작품으로 꾸몄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1막 전주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로 이어지면서 '오케스트라의 드림팀'이 빚어내는 화음과 리듬은 눈부시게 작열했다. 빈 필하모닉 악장 라이너 큐흘은 '세헤라자데'에서 내레이터 역할로 음악을 이끌어 가는 바이올린 독주를 맡아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미국.영국.벨기에.독일.프랑스.스위스.그리스.러시아.스페인.아르메니아.에스토니아.체코.덴마크.인도.일본.중국…. 검정 연미복과 드레스 차림은 여느 오케스트라나 다름없었지만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클래식 음악의 감동은 가슴 깊이 사무쳤다.

40개국 75개 오케스트라 출신 단원 90명은 창단 때부터 WOP의 취지에 감동해 출연료 한푼 받지 않고 참가한다. 우리 나라 출신으로는 98년과 2000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전용우(KBS 교향악단 악장).고주철(KBS 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수석)씨가 멤버로 참가한 바 있다.

2000년 런던 공연 이후 WOP에 네 번째 참가한 율리아 베커(36.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악장)는 "세계 최고 수준의 멤버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 자체가 감동"이라며 "매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올해부터는 베커의 남편 노버트 다우자커(뮌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호른 수석)도 WOP에 참가했다. 게르기예프는 지휘봉을 들지 않고 무대로 나왔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이쑤시개를 들고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23~29일 서울에서 키로프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교향곡 제6번'등 여섯 차례의 공연을 한다.

베이징=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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