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 법관의 시류 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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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현행 대학입시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가 우수학생들의 일부 인기학과 편중현상임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다.
작년의 경우 인문계 3백 점 이상 고득점자의 무려 70%이상이 서울대학교 법과를 지망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거니와 금년에도 그러한 추세는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금년도 입시에서 남녀 수석을 차지한 수험생이 똑같이 법과지망생이었으며,「S대 법과 합격」을 목표로 시험공부를 했다가 좌절되자 자살을 한 사건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좋은 대학, 인기학과란 한 시대의 시속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인 셈이다. 일류대학의 이른바 명문학과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 자체룰 나무랄 일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법과 선호가 비롯된 것은 전통적인 관전사상과 관계되며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과에 급제해서 어사화를 받고 금의환향한다는 것은 옛 선비들의 유일한 꿈이었다. 일제치하에서도 한국학생들이 그나마 관노에 오를 수 있는 길은 법과대학 졸업뿐이었다.
과거의 이 같은 배경을 들추지 않더라도 법과대학을 나와 고시에 합격하면 판, 검사와 행정부의 관리로서 출세길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일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고시에 합격했다고 해서 모두 출세를 하는 것은 아니며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사실이다.
법관이란 원래가 가난하고 고독한 직업이다.
20년 동안 대법관을 지낸 이영섭 전대법원장이『다시 태어나면 법관은 되지 않겠다』고 한 술회(어제 중앙일보 사회면)에서 화려한 경력에 비해 그의 직업이 매우 외로웠고 퇴관 후의 생활도 윤택하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씨의 이 같은 생활은 그의 강직한 성격, 법관을「성직」으로 보는 확고한 직업 관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예외」라고 할 수 있다. 현실로 눈을 돌릴 때「고시합격=입신」이란 풍조는 아직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의 먼 장래를 생각하면 우수학생들의 법과 편중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탄할만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법과 선호경향은 개인의 자질이나 소양보다는 시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나라가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길뿐이다. 그리고 우수한 인재들이 각분야에 고루 배치되어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선진조국의 구현」이란 우리 나라가 당면한 목표를 생각할 때 우수한 두뇌의 고른 배치는 초미의 과제인 것이다. 무엇보다 우수한 두뇌는 자연과학을 비롯해서 창조적인 학문분야에서 절실히 요구되고있다.
법관이란 가장 상식적인 사람들이 해내야 할 직무지, 반드시 우수한 사람들만이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은 오히려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 이영섭 전대법원장도 고급두뇌는 자연과학 쪽에 몰렸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데 무조건 자연과학을 전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자연계가 아니더라도 인문계 중에는 젊은이라면 한번쯤 도전해 볼만한 미개척분야가 얼마든지 있다.
법과 편중현상이 비단 시류 때문만은 아니고「선 시험·후 지망」을 하도록 된 현행 입시제도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것을 논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과를 지망해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누구도 넘보지 못한 분야에 뛰어들어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 젊은이로서의 기개며, 떳떳한 자세가 아닌지, 누구나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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