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자유당과 내각(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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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유당의 창당방향과 국회안 정파의 정리라는 이박사의 복안은 52년l월의 극비지시에서 엿볼 수 있다. 「본건은 외부에 공포하지 말고 진행할 것」이라는 주의를 붙여 각 도지사에게 공문이 하달됐다.

<도지사에 공문하달>
대통령의 극비지시문은 이랬다. <새 자유당의 정강과 요지를 발표한 바 있어 여러 동지가 보았을 줄 믿는 바이다. 그 선언에서 우리 주의와 주장을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을 성공하여야 민국 장래에 국민적 조직의 기초가 서게 될터인데 권위와 명망있는 분들을 앞세워 주장하게 하면 추세하는 민심에 비춰 성공이 쉬울 것이나 우리는 평민적 주의로 정당을 건설하느니 만큼 처음에는 이 사람들로 시작해서 상당한 당원수를 모집한 후에는 당원들의 공의로 지도자를 내세우자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지금 간부와 대표되는 여러 사람들에게 방임해 놓고는 좀 지체될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우선 각 도지사와 경찰당국이나 기타 공무원들과 군수중의 동지들로 하여금 조용히 양해를 얻어 가지고 각 민중이 이 정당의 필요를 깨우치도록 하여 단시일안에 성공하도록 해야 소수 사단체들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정부 권위를 사용해서 도지사나 다른 관직 명의를 행하지 않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든지 정당을 조직할 수 있는 것이므로 주저치 말고 민중으로 하여금 그 정당과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게 하여 누구든지 선서하고 입당 서명하는 사람은 당적에 두어서 얼마안에 전민족 대다수가 당적에 들어오도록 목적을 속히 수행하기 바란다.>
이박사의 지시는 창당을 각 정파 사람들에게 맡기고 있지만 곧바로 당의 주도권을 민중이 잡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때 신당운동은 원내와 원외가 갈라선 직후다. 이박사는 초기엔 신당운동을 무모할만큼 확대했다. 국민회등 각 사회단체외에 무소속이던 조봉암국회부의장. 심지어 야파였던 민우회간부들에게 까지도 신당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이박사의 말은 직선적인 것보다는 우회적인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여간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해석이 어긋나기 일쑤다. 어쨌든 비민국당계의 전 정파가 신당운동에 들먹거렸다.
민국당도 그 기세에 당황했음인지 성명을 내기까지 했다. 『정당운동은 정책을 내걸어 국민에게 선택하게 하는 것이지 정권을 이용하는 등의 졸렬한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 이대통령은 관제단체인 국민회와 한청을 근간으로 해 정당을 하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민주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는 것이 항의성명이었다.
이박사는 이런 성명엔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외신기자에게 『신당은 국민의 태반을 차지하는 일반국민이 국정을 돕게될 것이며 동당은 나의 신념을 반영할 것이고 신생국의 사기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신당은 처음엔 순조롭게 진행됐다.

<야파에도 참여권유>
9월엔 원내와 원외의 합동회의가 있었다. 원내 공화민정회의 조경규·오위영·이재학·양우정등 15명의 대표가 국민회의 이활, 대한국민당의 이유선, 한청의 유화청, 농총의 채규항,제헌동지회의 정현모등 대표들과 부산시내 광복장에서 회의를 했다.
10월 들어선 야파였던 민우회도 참여로 기울었다. 35의 멤버중 30명이 모여 신당추진 준비기구를 구성했다. 조직연락부 백남식·장홍염, 재정 김지태·이충환, 정책 윤길중·김의준등이다.
이들은 이재형·태완선·이재학등 신당운동의 주류인 공화민정회 대표들과 회합하고 합동을 협의했다.
이 자리엔 조봉암부회장도 참석해 신당운동에 뜻이 일치되면 양파 합동의 조정역을 맡기로 했다.
신당은 지도체제 문제에까지 나아갔다. 「총재 이승만, 최고위원 이범석·조봉암·윤치영·장택상·백성욱안」「당수·부당수제로 하고 그밖의 지도층은 중앙위 의장단으로 포용하는 안」등이 제시돼 절충되고 있었다. 이럴 때 자유당 창당운동에 태풍을 몰고온 것이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다. 11월27일 국무회의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의결하고 곧바로 국회에 제안했다.
국회의 모든 정파가 직선제 개헌안을 반대했다.

<모두 직선제 반대>
▲대통령의 직접 선거는 국민을 대표하고 있는 현 국회에서 할수 있다. 전쟁중이어서 시국도 불안정해 직접선거는 할 수 없다 -공화민정회 정헌주의원.
▲우리의 기호식 투표방식이 말해주듯이 민도가 낮아 국가원수를 직접 선출할 수 없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선거하는데 누가 누구인지 얼굴도 잘 모를 일반국민이 선거해서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민국당 이춘기의원.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대통령직선제는 시기상조다-민우회 신광균의원.
이처럼 국회의 모든 정파가 직선제를 반대했다. 대통령도 이 개헌안이 통과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자유당 창당에 혼선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개헌안 제안을 강행했다.
당시 총리서리였던 허정씨의 회고.『이박사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재선을 반대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재선을 바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을 이룩하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이 고정된데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통일에 대한 집념때문에 자신의 재선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국회에는 이박사를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재선을 위해 꼭 직선제개헌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박사는 개헌안을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국회의 분위기로 보아 개헌안은 통과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보다는 국회안 정파들과 협의를 할테니 대통령이 의원들을 과거와 달리 우대해 달라고 청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안될 때 안되더라도 개헌안을 제출하라.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개헌안을 국무회의에 올릴 때도 개헌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랬지만 다른 국무위원들은 모두 대통령의 뜻대로 개헌안을 제안해놓고 보자고해 개헌안을 의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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