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3)|제79화 육사졸업생들 (66)|협상의 시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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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미제담배와 일본제 녹찻잔이 놓여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경비대 연태장인 김철렬중령과 반도의 두목 김달삼의 회담이 무르익어 갔다. 아직 동안의 27세의 두 청년이었다. 김달삼이 말을 꺼냈다.
『당신은 미군정하의 조선인 군인이다.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행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연대장이 개인자격으로 이런 회담에 나올 권한은 없다. 나는 미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다. 나는 군정장관「제너럴·딘」의 권한을 대표하며 여기서의 나의 발언이나 결정은 군정장관의 그것이다.』
『그러면 회담이 되겠다. 나는「폭도」(김달삼은「제주도민의거자」라고 호칭)의 전권을 가진 대표자다.』
김달삼은 이어 미리 준비해 둔 노트의 메모를 보면서 앉은 채로 약 30분간 공산주의자답게 열변을 토했다.
그 내용은 경찰과 서책을 『미제의 추구』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이 무고한 제주도민을 탄압하고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에 이번 폭동의 목적은 이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말이었다. 김중령이 입을 열었다.『해방된 지 3년이 됐고 미군정하에서 군인노릇을 하면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혀왔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공산주의를 배웠고 얼마나 알겠는가. 알지도 못하는 외래사상을 위해 청춘이나 생명을 바칠 필요가 있겠는가. 민족의 자주독립이 급선무이니 무기를버리고 귀순하여 조국건설을 위해 합심하여 노력하자.』
김달삼은 안색을 바꾸고 핏대를 올리면서 언성을 높여 말했다.
『연대장은 정의감이 강하고, 선악을 식별하는 분별력있는 사람인 즐 알았는데 당신도 민족반역자나 악질경찰처럼 자기네 죄상을 은폐하고 우리「의거」를 공산주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가.』
근처에 있던 폭도들도 일제히 김중령과 우리당국에 대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김달삼은분을 참지못해 계속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회담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이다. 이젠 믿을데가 없으니 이북에 연락하고 마지막엔 소련의 지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당신들이 정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회의를 계속하자.』
『우리가 폭동을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켰는 줄 아는가. 살기 위해서 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조건을 들어주고 자유롭게 살수 있게만 해준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다.』
『오늘 즉시 지서습격등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하도록 요구한다.』
『연락상 즉각 중지는 어렵다. 전도에 연락하려면 5일 정도는 주어야 한다』『무장은 즉각 해제하라.』
『비무장 주민을 하산시켜 약속이행여부를 확인하고 자유와 안전이 보장됐으면 3개월후에전원무장해제를 받겠다』『범법자의 명단을 제출하고 전원 즉시 자수토록 하라.』
『무슨 소린가. 우리의 살인·방화는 정당방위이며 당연한 행위다.』
『법치국가에서의 살인·방화는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불법이며 정당성여부는 재판을 통해서 가려져야 한다. 나의 요구는 이상 세가지다.』
여기서는 72시간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인 충돌이 있으면 연락미달로 간주하고 5일이후의 전투는 약속위반의 배신행위로 본다, 무장해제는 측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는 두 가지 조건에 합의하고 범법자 인도문제는 나중으로 미뤘다.
이어 반도측의 요구조건이 나왔다.『제주도민으로 행정과 경찰업무를 수행하고 반역적인 악질경찰과 서청을 제주도에서 추방하라.』
『민족반역행위·악질행위가 입증되면 해직·추방·처벌하겠다. 제주도민 만으로의 행정·경찰구성은 정치적인 문제이지 군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정부가 들어서면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약속한다.』
이때 밖에서는 반도들이 함성과 박수를 쳤다.
『제주도민의 경찰이 편성될때까지 군대가 치안을 맡고 지금의 경찰을 해체하라.』
『이 회담이 성공하면 자연히 군대가 치안을 맡게되며 경찰은 나의 지휘를 받게 된다. 따라서 해체할 필요는 없고 인원을 축차로 개편하겠다.』『의거(폭동)참여자를 전원 불문에 붙이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교전중이 아닌때 범한 살인·방화행위 외에는 전원 불문에 붙인다. 군에 귀순하면 생명과 재산·안전·자유를 보장하겠다. 살인·방화를 행한 범인이라도 귀순하면 극형은 면해준다.』
김달삼은 범인문제에만은 승복하지 않았다. 시간은 4시30분이 됐다. 김중령이 말했다.
『나는 지금 가야 한다. 5시까지 귀대치 않으면 내가 당신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고 내부하들이 전투를 개시하기로 돼 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고 다시 만나 마무리 짓자.』
회담장이 갑자기 긴장됐다. 김달삼이 말했다.
『오늘결말이 안나면 결렬이다.』『그러면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범법자 명단을 제시하라.당신과 지도급들은 중벌을 면치못할 것이나 모든 폭도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책임있게 해주면 내가 개인자격으로 배를 마련해서 희망하는 해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
회의장엔 회색이 감돌았고 김달삼은 김중령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말했다.
『정말 고맙다. 귀순과 무장해제가 약속대로 잘 끝나면 나도 자수하여 모든 책임을 질 것이고 법정에 나가 우리의 정당성을 정정당당히 밝히겠다.』『오늘의 약속은 나의 생명과 명예를 걸고 이행하겠다. 내 가족 전원을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당신들에게 인질로 맡기겠다.』
『당신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데 불편한 이곳에서는 노모와 부녀자를 모실수가 없으니 내가 지정하는 민가에 이주시키되 주변에 군인이나 경찰이 얼씬하지 말라. 우리가 감시하겠다.』『좋다. 그렇게 하겠다.』
이렇게 하여 대체적인 합의가 성립되어 김중령일행은 지프를 몰아 반도지역을 벗어났다. 4시간에 걸친 진땀나는 담판이었다. 연대에 들렀다가「맨스필드」대령에게 협상결과를 보고했더니 그는 만족이었다. 제주군정청의 명령에 따라 경찰은 자체건물 경비만 하고 그 밖의 지역전체의 치안책임은 경비대가 떠맡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로부터 더욱 복잡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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