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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강릉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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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강릉최씨의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최필달. 왕건의 창업을 도와 영첨의정승(고려 첨의부의 최고관직·종1품), 삼중대광(경1품)에 오르고 경흥(강릉의 별칭)부원군에 봉해지니 본관을 「강릉」으로 삼았다. 그는 고려초기 학문을 정립하고 예를 가르쳤던 문무겸비의 학자로 해동부자라 일컬어졌다. 강원도강릉시 운형동에 위치한 『동산사』는 그의 위패를 모신 강릉최씨의 성역이다.

<왕건의 창업도와>
우리나라 범최씨의 시조는 신라의 전비인 사노6촌중 돌산고허촌장이었던 소벌도리로 일켣는다. 최필달 또한 그의 후손으로 믿어지나 상계에 관한 기록은 없다.
고려사를 들춰보면 숱한 최씨들이 역사를 수놓고 있다. 그러나 강릉최씨가 배출한 명현으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인물은 극히 드물다.

<고려사를 수놓아>
고려조에 번성을 누렸던 가문이었기에 쇠퇴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선조에 대한 기록도 많이 흩어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시조의 4세손으로 삼중대광에 오른 최숭언, 충렬왕9년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명주군에 봉해졌던 최한주, 삼사(고려때의 관청) 좌윤(종3품)을 지낸 최원량등이 고려조에 돋보이는 강릉최씨의 인물들이다.
최한주는 일본정벌당시 항해중이던 선박이 태풍으로 암초에 걸려 침몰직전의 위기에 있을 때 바다로 뛰어내려 암초를 깨뜨리고 배와 장졸들을 구출해 냈다는 전설적인 장수. 이밖의 인물로는 최복하(천성부윤·대사간), 최원체(한성판윤·정2품), 최천계(평안도절도사·강계부사)등이있다.
조선조에서 강릉최씨가 배출한 문과급제자 수는 37명. 최씨 가운데는 전주·해주·경주최씨다음으로 랭킹4위.

<37명이 문과급제>
최치운 일가는 조선조에서 강릉최씨를 빛낸 명문이다. 치운은 태종17년 문과에 급제, 공·형·이조참판, 집현전 직제학등을 지냈다. 전후 다섯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하며 외교에 꿈이 있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조정에서 큰일이 있을 때나 판결하기 어려운 형옥이 있을 때는 왕이 친히 불러 자문을 청했던 명신이었다. 평생동안 지나치게 술을 즐겨 세종이 친필로 『절주』하라는 글을 내리니 그 글을 벽에 붙여놓고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치운의 둘째아들 최응현은 「효」를 위해 벼슬을 사양했던 유명한 효자였다. 단종1년 을과에 l등으로 급제, 승문원의 부정학(종9품), 박사(정7품), 성균관의 사성(종3품)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고향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를 모두 사양하고 강릉훈도(종9품)에 만족했다 한다. 성종11년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을 지어놓고 산소를 지키기 3년, 그동안 한번도 집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친후(성종11년) 드디어 대사헌(종2품)에 올랐으며 전후 3차례나 이 직책을 맡았다. 연산군4년에는 임금을 간하다 거슬려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했다. 그후다시 복직, 공·병·이조참판등을 역임하는 등 기복을 겪었다. 그후 세째 아들이 중종 때 형·호조판서등에 오른 최세절이다.
최수성은 백면선생(글만읽고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던 고고한 기품의 선비였다.

<명사신 다섯차례>
최응현의 손자인 그는 김굉필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조광조, 김정등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선비로서 만족했을 뿐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았다. 당시(연산군) 의 혼탁한 세상에서 벼슬길에 오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지리산, 금강산등 명산을 찾아니다며 금풍매월로 살았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북해거사』 또는 『경호산인』. 시문·음률·서화·수리등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요 절필.
신사무옥(중종l7년, 안처겸등이 당대의 권신이었던 남곤, 심정등을 제거하려다 계획이 탄로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옴을 당했다.
최문오, 문활, 문식등 3형제는 최세절의 현손(손자의 손자)으로 인조 때 모두 문과에 올라 3형제등과로 세상의 부러움을 샀다. 그중 아우인 문식이 가장 높이 올라 병·형·예조참판, 황해도관찰사, 호당부제학등을 지냈으며 숙종5년에 대사헌에 올랐다.
최익령(중종조·왕자수부), 최광필(선조초·예문관직제학), 최강(세종조·강릉부사·칠도병마절도사)등도 조선조의 인물들이다.
최배천은 임진왜란 당시 정선지방전투에서 의병장 정문부와 함께 북진하는 왜군을 섬멸시키는데 용맹을 떨쳤던 숨은 공로자다.

<용맹떨친 최배천>
최규하(국정자문위의장)전대통령은 해방후 강릉최씨문중을 대표하는 얼굴. 41년 일본 동경고등사범을 졸업, 서울사대 교수등을 역임하다가 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관계에발을 들여놓은 후 외무부장관(67년∼71년)·대통령 외교담당특별보좌관(71년)·남북조절위대표등을 거쳐 국무총리에 이르렀다. 10·26사태이후 격동기에 제10대 대통령에 올라 제5공화국 출범직전까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물러났다.
공화당시절 농수산·상공장관등을 역임했던 최각규(한양화학(주)사장), 건설부장관을 지낸 최종완(만성공업사장), 최옥자(세종대학명예학장), 최종성(전국회의원·한국주택협회장), 최영규(예비역육군중장·전5·16혁명 재판소장), 최종영 (서울고법부장판사)씨 등이 현대 강릉최씨 문중의 인물들.
강릉최씨대종회(회장 최경규·78·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332)는 전국40만 종친들의 결속을 다지는 중앙기구. 지난 78년 지상4층(연건평2백70평)의 강릉최씨 대종회관을 준공, 국고보조2억2천만원과 종중에서1원을 모아 동산사(시조 최필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건립등 활발한 숭조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장학사업으로 3천만원(목표액1억원)의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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