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수치스런 합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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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가계든 기업이든 적자가 나면 빚으로 메워야 한다. 파산을 면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가령 한 달에 300만원 버는 사람이 400만원을 썼다면 100만원은 빚이다. 빚을 지지 않으려면 수입과 지출을 맞춰야 한다. 수입을 생각하지 않고 흥청망청 쓰다가는 결국 빚더미에 올라앉고, 마침내 파산하고 만다. 국가도 똑같다. 세출이 세입을 초과해 생긴 재정적자는 빚을 얻어 보전해야 한다. 국가 채무가 늘어나는 것이다.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할퀴고 지나간 미국의 채무가 4일 현재 7조9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미 국가채무 시계(US National Debt Clock)'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인구시계처럼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나랏빚은 매일 16억8000만 달러씩 불어나고 있다.

적자가 쌓이더라도 계속해서 남의 돈을 끌어와 그걸 메울 수만 있다면 가계가 굴러갈 수 있다. 미국이 지금 그런 처지다. 미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본 나라들에 미국은 열심히 재무부 채권을 팔고 있다. 미국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국가 채권이다. 여기서 생긴 달러로 적자를 메우고 있다.

지난해 중국은 1620억 달러의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일본과 한국도 750억 달러와 140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동북아 3국이 미국에 부지런히 물건을 팔아 번 돈으로 미 국가 재정에 생긴 구멍을 막아주고 있는 꼴이다. 6월 말 현재 일본의 미 재무부 채권 보유액은 6802억 달러로 1위다. 이어 중국이 2432억 달러로 2위, 한국은 597억 달러로 6위다. 3국이 동시에 채권 회수에 나서거나 더 이상 채권을 매입하지 못하겠다고 버틸 때 닥칠 사태를 상상하면 이들 3국이 미 경제의 목줄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카트리나로 넘친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외피 속에 가려졌던 미국의 벌거벗은 몸이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라크에서 매달 56억 달러를 전비(戰費)로 쓰면서도 뉴올리언스 홍수 방지 프로그램에 꼭 필요하다고 올린 1억500만 달러의 예산을 4000만 달러로 싹둑 잘라버린 나라가 미국이다. 엉뚱한 곳엔 돈을 펑펑 쓰면서 정작 써야 할 곳에 인색한 것은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14만 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보내는 바람에 국내 치안을 담당할 병력이 모자라 무법천지로 변한 약탈 현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허리케인이 몰려와도 대피할 수단조차 없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12.7%에 달하는데도 '감세(減稅)는 최선의 정책'을 '만트라'처럼 외우며 잘사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금을 팍팍 깎아주는 나라가 미국이다. 최악의 물난리로 시신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도 "설마 제방이 무너질 줄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남의 일처럼 말하는 사람이 대통령인 나라가 미국이다. 이런 미국을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모린 다우드는 '수치스런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shame)'이라고 명명했다.

카트리나로 미국이 당면한 위기는 다름 아닌 신뢰의 위기다. "제3세계도 아닌 미국이 이럴 수가…"라는 탄식과 놀라움 뒤에 오는 것은 미국이란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의문과 불신이다. 미국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각국이 미국에 계속 돈을 빌려주는 배경에는 설마 미국이 망하겠느냐는 심리가 깔려 있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막연한 신뢰감이다.

그러나 허리케인 한 방의 충격에 휘청거리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미국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천문학적 쌍둥이 적자를 전제로 굴러가고 있는 지금의 세계 경제는 위험한 줄타기와 다름없다. 어느 한 곳이 삐끗하면 불안한 공존의 사이클이 언제 공멸의 사이클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 촉발점은 부동산 거품의 붕괴일 수도 있고, 고유가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2의 9.11일 수도 있다.

미국이 방만하고 왜곡된 재정 운영의 틀을 바로잡아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번 카트리나는 미국과 함께 세계가 파산으로 가는 대재앙의 전조가 될지 모른다.

배명복 국제담당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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