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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B는 없다" … 정부, 노사정 합의 상관없이 강행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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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한국노총이 의견 접근이 이뤄지던 노사정 대타협안을 막판에 뒤집자 김대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이 ‘사퇴’라는 배수진을 쳤다. 정부는 노동계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으면 노사정 합의와 상관없이 일정대로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겠다는 태세다. 김 위원장과 정부가 이런 강수를 두는 이유는 노동시장 개혁의 절박감 때문이다. 이번에 개혁의 틀을 잡지 못하면 노동시장의 후진성이 향후 경제 회복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김 위원장은 “개혁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누차 강조해왔고,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사·정이 모두 그동안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눈을 감아왔다. 이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까지 왔다”고 말했다. 다만 노사정간 합의 없이 개혁을 추진하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노사정 대타협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런 노력이 16일 오전까지만 해도 빛을 발하는 듯했다. 이 장관은 16일 “다소 추상적인 문구가 있더라도 구체적인 개혁방안에 대한 공동 합의문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네덜란드 경제를 부활시키고 유럽의 강자로 키워낸 바세나르 협약에 버금가는 협약을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협상 당사자인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도 “어느 정도 구체적인 방안이 담긴 합의문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15일 오후 5시부터 진행된 노·사·정의 비공개 회의에서도 한국노총측은 6페이지에 달하는 정부 합의문 초안의 문구 하나하나에 의견을 제시하며 의지를 보였다는 게 당시 협상 당사자들의 전언이다. 그런데 16일 밤 이런 기대가 물거품이 됐다.

한국노총이 상징적인 선언문만 발표하고, 추후 구체적인 것은 시간을 갖고 협상하자고 통보하면서다. 이와 관련 한국노총 이정식 사무처장은 “노총 차원에서 정부가 제시한 안에 대해 별도로 논의하기 위해 문구의 정당성 등을 따진 것”이라며 “각 현안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도 없는 상태에서 합의문을 내놓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게 한국노총의 일관된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노사정 대타협에 공을 들였던 김 위원장이 사퇴 카드를 꺼내 들기에 이르렀다. 이 장관도 17일 “이번에 노동시장 개혁을 못하면 개혁의 주체가 개혁 대상이 될 것”이라며 “(노사정 합의기간을 연장하는 것과 같은) 플랜B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정부는 관계부처 회의 등을 통해 마련한 노동시장 개혁방안을 추진하기 위한 수순 밟기에 착수했다. 정부 관계자는 “22일 노사정위 본회의 때까지 마지막 타협을 시도하겠다”면서도 “합의가 되지 않으면 정부 안을 모두 공개하고, 개혁에 필요한 관련 법 제·개정을 위한 입법예고를 강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18일 향후 일정에 대한 최종 점검을 한 뒤 22일 국민경제정책자문회의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방향을 담은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할 방침이다. 이어 24일에는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여기에는 ▶저소득층의 소득 향상을 위한 사회안전망 확충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차별해소 ▶일용직의 처우개선 ▶파견 업종 확대 ▶특수형태 고용종사자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 ▶공공부문 임금체계 개편 ▶원·하청 상생을 위한 세제개편 ▶근로시간 감축안 등의 내용이 담길 전망이다.

 정부가 노사정 합의와 상관없이 노동시장 개혁에 속도를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내년 상반기까지 개혁의 큰 틀을 마련하지 못하면 노동개혁이 물 건너 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올해 말에 관련 법을 입법예고하고 정부 내 규제심사 등을 거치면 3개월이 소요된다. 여기에다 국회에 법안을 제출해도 법안심사소위 의결과 같은 절차를 밟다 보면 다시 3개월이 걸린다. 이 시기를 놓치고 하반기에 접어들면 정치권의 총선 분위기, 국정감사, 예산심의와 같은 국회의 하반기 일정 때문에 물리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없게 된다. 김대환 위원장은 “법 개정을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내년 5월말까지는 세부적인 개혁의 틀을 잡아야 한다. 어물쩍하면 총선과 대선 분위기에 휩쓸려 ‘골든타임’을 허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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