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둥둥 뜬 호수, 아파트 복도 … 한국화, 관념 비우고 현실을 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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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제목은 그저 ‘산수’,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린 충주호 풍경이다. 화면 가운데를 두고 진짜 산과 물에 비친 산이 데칼코마니처럼 맞물린다. 실제와 허상이 충돌하는 이 세상의 불온함을 담은 유근택식의 산수화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 속 장면은 복도식 아파트, 그 아파트 앞산, 서울 시내 담벼락이다. 충주호를 그린 산수화에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깡통, 맥도널드 로고, 미키 마우스 따위가 둥둥 떠 있다. 이 충주호 산수화 열 점은 전시장 한 방 벽면에 빙 둘러 설치했다. 사간동 담벼락은 높은 벽에 세로로 두 점을 걸었다. 그 담벼락 아래는 똘똘 뭉쳐 서서 수런거리는 아이들을 그려 넣었다.

 서울 수송동 OCI미술관에서 28일까지 열리는 한국화가 유근택(49·사진) 성신여대 교수의 개인전 ‘끝없는 내일’이다. 유씨는 한국화에서 관념성의 무게를 덜어내고 주변 일상에 매진하며 그 범위를 넓히는 작업을 해 왔다. 학생들과 수학여행길에 물 빠진 충주호에서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받은 낯선 느낌이 오늘날의 산수풍경이 됐다. 호수 주변 풍광과 수면에 비친 경치를 비슷한 비율로 그려넣고는 어느 것이 실제 모습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지 묻는다. 피카소·마그리트·뒤샹 등 서양 미술 대가들의 작품 이미지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서양 문화가 스며들어와 동양 문화와 충돌한다. 우리 삶이 뒤죽박죽된 비빔밥 같은 세상”이라며 “우리 사회는 대단히 긴박하게 움직이고 조여져 있다. 지금의 우리가 산수를 대할 때는 그만큼 절박한 기분이 아닐까”라고 작가는 말했다. 실제와 허상, 진실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이 충돌하는 이 세상. 한국화라고 이제는 없는 산수 풍경이나 담으며 음풍농월할 수는 없다. 일상적인 듯 기괴한 풍경이 펼쳐진 불온한 호수 그림 앞에 서서 유 교수는 “변화하는 세계를 어떻게 그릇에 담을지가 한국화의 숙제다.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면 한국화의 현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장 3개 층에 펼쳐진 60여 점의 그림은 ‘한국화의 위기’라는 레토릭을 무색케할만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가까이 다가선다.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는 “한국화 전시라는 카테고리에 가둘 필요도 없다. 스스로를 갱신하면서 도약하는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는 현대미술전이라는 점에서도 이번 전시의 성취가 돋보인다”고 평했다. 02-734-044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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