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32>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학벌이 안 좋아서 취직이 안 되었다는 얘기는 그 후 친구들 사이에 농담거리로 자주 오르내렸다. 그래서 '경기 야간'이라는 말이 생겼고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고 재야에 남은 이들은 모두가 야간부로 불리게 된다. 김근태.유인태는 물론이고 하버드대까지 가서 공부깨나 했다는 백낙청도 나중에는 일본에 있는 평론가 정경모까지 모두가 경기 야간이라고 했다.

그가 아예 취업도 못하고 문턱에서 좌절되었으니 나 혼자 다닐 수도 없고 하여 다른 회사를 알아보기로 했는데 손학규도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했다. 후배들 일이라면 언제나 발 벗고 도와주는 박윤배 선배에게 부탁해서 그가 머물던 도계탄광 근처의 도계중학 졸업증명서를 떼어서 갖다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게 면접 당일에는 되도록 허름한 작업복을 구해서 입고 가자고 당부했다. 그래도 학규가 안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역시 도계중학 졸업증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그 자리에서 합격이 되었다. 우리는 그 즉시 목공부에 배치되었다.

당시에는 전축이나 텔레비전 같은 가전제품이 고급 가구 취급을 받았다. 전축 기계 자체보다도 그것을 세팅해서 박아넣을 장식장에 더욱 공을 들였다. 최고급 마호가니 나무에서 합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잎사귀 무늬라든가 줄무늬 등을 넣었고 텔레비전 박스도 고급 목재로 짜고 화면 앞에는 여닫이 문까지 만들어 달았다. 우리 같은 초보들은 복잡한 목공예 라인에는 배치되지 않았고 주로 단순작업조에 붙여주었다. 물론 전에 다니던 공장에서처럼 숙련공의 조수역이었다. 전축이나 텔레비전의 다리를 똑같은 규격으로 자른다든가, 상자 뒤편에 붙일 합판을 자른다든가 하는 일 따위였다. 배치를 받기 전에 각 라인의 작업을 책임진 조장이 우리를 앞에 세워놓고 교육을 했다. 그날 할당받은 작업량은 시간이 늦어져도 반드시 채워야 한다. 원자재를 타올 때 전해진 규격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지 않으면 제품은 모두 폐품 처리가 되고 작업 당사자가 모두 물어내야 한다. 작업 중의 부주의는 그대로 산업재해와 연결된다. 물품을 기계에 넣고 뺄 때에 반드시 스위치를 밟아 기계를 꺼주어야 한다. 톱날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부주의하면 손가락이 잘리고 이 또한 당사자 책임이며 회사에서는 안전 작업도구를 제공하고 교육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 여러분이 작성한 취업원서에서 모두 응낙하고 도장을 찍은 만큼 각자 알아서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고 보면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할 수 있는 작업조건인 셈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나무토막이나 합판 조각을 자르는 일이었지만 여공들의 작업을 보니까 합판에 풀칠만 하는 조, 못만 박는 조, 구멍 뚫는 조 등등으로 모두 단조롭고 반복적인 작업을 시켰다. 그러나 자연히 임금도 매우 박한 형편이었다. 전자부품을 직접 조립하는 부서는 아예 공장 건물이 다른 쪽에 있었다.

아침에 사수가 자재부에 가서 합판과 각목을 잔뜩 타 가지고 종이쪽지에 작업할 규격을 적어 가지고 오면 작업 개시였다. 가령 전축이나 텔레비전 박스의 다리를 깎는다면 나는 먼저 그 길이를 규격대로 잘라서 쌓아놓고 사수가 그것을 엇비스듬하게 위는 넓고 아래는 가늘게 다시 잘라 놓는다. 이것이 다른 조로 넘어가면 동그랗게 또는 모나게 샌드페이퍼나 대패로 마감질되는 것이다.

그림=민정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